14개 대파시조

대파- 사인공파 파시조 중조 17세 사인공(舍人公) 조(초두밑+脩)

녹전 이이록 2009. 2. 16. 13:39

■ 대파 사인공파

 

 

● 파시조 중조 17세 사인공(舍人公) 조(초두밑+脩)

 

 

대파(大派)인 사인공파(舍人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세계(世系)는 15세 열헌공(휘 핵)→ 16세 3남 송암공(휘 세기)→ 17세 4남 사인공 조 이다.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처음 곽산에 들어가 이름을 훤(萱)으로 고쳤다.

 

묘는 곽산(郭山) 문례산(文禮山)에 안장되어 있다.

 

공은 문희공(文僖公- 휘 세기)의 계자(季子- 막내)로 고려 말에 곽산으로 유배되니 이로 인하여 집을 짓고 살게된 것이다.

 

곽산지(郭山誌)와 금석록(金石錄)에 나타나 있다.]

 

위는 족보에 기록된 내용이다.

 

 

벼슬은 사인(舍人-내사문하성의 종4품 벼슬. 문종 때 중서사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이다.

 

사인공(舍人公-휘 조)은 일찍이 학덕(學德)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강직고절(剛直高節)한 성품으로 인하여 화를 입고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곽산(郭山-평안북도정주定州)으로 배소(配所-귀양살이하던 곳)를 옮겼다.

 

이곳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게된 것이다.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 두문동(杜門洞)에 우거(寓居)하며 조선왕실의 입조(入朝-조정에 들어가는 것) 권유를 끝내 뿌리쳤다.

 

 
이름을 훤(萱)으로 고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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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가 '초두 아래에 脩'인데 옥편에는 '수', '조' 두 가지로 읽고 있다.
대종보에는 '조'라고 읽고 판윤공파보에는 '수'라고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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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杜門洞) 청절사(淸節祠)에 배향(配享)된 절신(節臣-절개가 곧은 신하) 20인 중 한 분이다.

 

8세손 촌림, 춘우 형제분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 순절(殉節)한 하늘이 내린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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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문동(杜門洞)-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는 옛 지명이다.
해방 전에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속하였다.

 

1392(태조 1)년 이성계(李成桂)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반대하던 고려의 유신(遺臣)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등 72인이 

고려에 대한 충성과 지조를 지켜 조선의 녹을 먹지 않으려고

개성을 떠나 동남방 부조현(不朝峴)에 고려 때 입던 조복(朝服)을 벗어놓고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뒷날 정조 때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모셨으며,

후세에 이를 추모하여 위국순절(爲國殉節)의 귀감으로 칭송하게 되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다.

 

사인공(舍人公. 휘 조)할아버님은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된 72인이 아니고

청절사(淸節祠)에 배향(配享)된 절신(節臣-절개가 곧은 신하) 20인 중 한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