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 대파시조

대파 - 국당공파 파시조 17세 국당공(菊堂公) 천(초두밑인변+靑)

녹전 이이록 2009. 2. 14. 15:00

■ 대파 국당공파

 

 

● 파시조 17세 국당공(菊堂公) 천(蒨)

 

 

세계(世系)는 15세 열헌공(휘 핵)→ 16세 3남 송암공(휘 세기)→ 17세 장자 국당공 천 이다.

 

문희공(文僖公. 松巖公) 세기(世基-益齋公 仲父)의 장자로 익재공과는 사촌(四寸)간이다.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국당(菊堂)이다.

 

1299년(己亥. 충렬왕 25)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였다.

 

한림사인(翰林舍人), 이부랑중(吏部郞中)을 거쳐 문명(文名-글로서 이름을 떨침)을 얻었다.

 

1321년(충숙왕 8) 우사보(右思補)로서 폐인(嬖人- 비위를 잘 맞추어 남에게 귀염을 받는 사람) 이인길(李仁吉)의 첩의 아버지 서경낭장(西京郎將) 최득화(崔得和)을 수주수령(隨州守令)으로 임명하려 하자 고신(告身-직첩職牒-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으므로

왕이 진노하여 곤장을 치고 섬에 유배하니 공의 직성(直聲-곧은 소리)이 일세에 떨쳤다.

 

1343년 충혜왕때 첨의 평리 상의(僉議評理商議)에 승진하고

 

1344년(충혜왕 복위5) 지공거(知貢擧) 박충좌(朴忠佐)와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과거의 고시관. 지공거와 함께 시험을 관장하였다.)로 하을지(河乙沚) 등 3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

 

충목왕 즉위 원년(1345) 첨의 평리 상의(僉議評理商議)로 원나라에 가서 교사(郊赦-하늘에 제사 지내고 은사恩赦를 베푸는 일)를 축하하고 돌아왔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왕이 서연(書筵)을 설치하여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왕에게 경서 (經書-유학의 근본이 되는 문헌)를 시강(侍講-왕이나 동궁의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일)하였다.

 

곧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45년에 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推誠輔理功臣 三重大匡僉議政丞)·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충정왕(忠定王) 기축(己丑. 1349)년에 졸(卒)하였으니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남원 어은사(漁隱祠)· 경산 도천서원(道天書院)· 청주 운곡사(雲谷祠)· 고흥 세덕사(世德祠) · 경주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 되었다.

 

공(公)은 국당공파 파조(菊堂公派派祖)이다.

 
배(配)는 세분으로 첫 부인은 담양 설씨(潭陽薛氏)로 중서문하 판병부사(中書門下 判兵部事-병부판사) 문정공 경중(文貞公敬中)과 전리판서(典理判書) 판서공 배중(判書公培中) 형제를 낳았고,

  

둘째 부인은 죽산 박씨(竹山朴氏) 죽성군(竹城君) 전(山아래而+頁)의 따님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제정공 달충(霽亭公達衷)을 낳았으며

 

셋째부인 순창박씨는 보국검교 좌정승(輔國檢校左政丞)을 지낸 정순공 성중(靖順公誠中)을 낳았다.

 

 

● 국당공신도비명(菊堂公神道碑銘) 역문(譯文)

 

 

고려(高麗) 말기에 도학과 절의의 인물이 우뚝하여 서로 바라보이게 배출되었으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에는 국당(菊堂) 이 선생(李先生)의 종제 익재공(益齋公)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여 일찍부터 *문채(文彩)있고 영걸(英傑)하여 조정에서 강직함으로 드날리었으니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일컫게 되었다.

 

공(公)의 휘는 천(풀초밑인변+靑)이요, 자(字)는 군실(君實)이요, 국당(菊堂)은 그 호(號)이니 신라급량부 대인(新羅及梁部大人) 휘 알평(謁平)에서 시작 되었고 여러 대(代)를 전하여 휘 금서(金書- 중조 3세)가 있으니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참여했고, 휘 윤홍(潤弘- 중조 4세)은 대제학(大提學)이니 벼슬이 혁혁하였다.

 

또 11대(十一代)를 내려와서 할아버지 휘는 핵(부수10획솥력+羽- 중조 15세)이니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좌복야(左僕射)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휘 세기(世基)는 밀직부사 대제학 검교정승(密直副使大提學檢校政丞)이요, 시호는 문희(文僖)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니 예빈 윤찬(禮賓尹瓚)의 따님이다.

 

공(公)이 문장(文章)이 현저하고 벼슬이 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첨의정승 지예문관 춘추관사 문하시랑 동평장사 월성부원군(推誠輔理功臣 三重大匡僉議政丞 知藝文館 春秋館事 文下 侍郞同平章事月城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남원 어은사(南原漁隱祠)에 배향 되었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공(公)이 충렬왕(忠烈王) 기해(己亥. 1299)년에 문과(文科) 장원에 발탁되어 한림 사인(翰林舍人) 이부랑중(吏部郞中)을 지내고 충숙왕(忠肅王) 신유(辛酉. 1321)년에 우사보(右思補)가 되었는데 이때에 왕(王)에게 *고이는 사람 이인길(李仁吉)이 그 첩(妾)의 아비를 랑장(郞將)을 시키려 하자 직접 서명하지 않으니 인길(仁吉)이 왕(王)에게 참소하여 공(公)을 곤장 때리고 해도(海島- 섬)로 유배하니 정직한 소문이 세상에 들리었다.

 

충혜왕(忠惠王) 4년(四年. 1343)에 첨의상의(僉議商議)가 되고 5년(五年) 3월(三月)에 원나라에 가서 *교사(郊赦)를 축하하고 6월(六月)에 *서연(書筵)에 들어갔다.

 

공(公)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익재(益齋)와 및 채하중(蔡河中)· 한종유(韓宗愈)·  박충좌(朴忠佐)로 더불어 날을 바꿔가며 왕(王)을 뫼시고 글을 읽었고 10월(十月)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충목왕(忠穆王) 을유(乙酉. 1345)년에 참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공(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약력이다.

 

일찍이 세 아우와 여러 종항(宗行- 사촌 형제사이)으로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고 연달아 장원급제에 올라 한 문중이 빛이 나니 사람들이 평장리(平章里)와 한림촌(翰林村)으로 불렀다.

 

민묵헌(閔默軒) 지(漬)의 시에 이르되 『빛나는 꽃 봉우리는 *세집의 다섯 장원이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적선(謫仙) 이태백(李台白)의 재주라 한다』하였고

 

이도은(李陶隱) 숭인(崇仁)은 *세과(世科)라고 했으니 대저 동암(東菴) 문정공(文定公) 진(王+眞)과 송암(松巖)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와 내서사인(內書舍人) 부(木+貝없는賻)과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과 및 公이 서로 이어서 장원한 까닭이다.

 

공(公)의 제 3자(三子)인 달충(達衷)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축하하는 손님이 가득히 찾아왔는데 *백반(白飯)을 장만하니 당시에 *열반회(熱飯會)라고 칭하였으니 공의 청백하고 검소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충정왕(忠定王) 원년(元年) 기축(己丑. 1349)年 7월(七月) 계묘(癸卯)에 돌아갔다.

 

묘소(墓所)는 교하군 북리산(坡州交河郡北里山)에 있으니 지금의 파주시 아동 백금(坡州市 阿行가운데同 佰今)의 자좌(子坐)이니 삼부인(三夫人)을 *합부(合?)했다.

 

4남(四男)을 두었으니 담양 설씨(潭陽薛氏)는 경중(敬中)을 낳아 대광중서 월성군(大匡中書月城君)이요. 배중(培中)은 전리상서(典理尙書)요.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죽성군(竹城君) 전(王없는瑞+頁)의 따님인데 달충(達衷)을 낳아 익찬공신 삼중대광 계림군(翊贊功臣三重大匡鷄林君)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요.

 

순창 박씨(淳昌朴氏)는 성중(誠中)을 낳아 개국원종공신 특진보국 검교좌의정(開國原從功臣特進輔國檢校左議政)이요.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딸은 윤자표(尹之彪)에게 출가했다.

 

손자에 육(毓)은 소감(少監)이요. 민(敏)은 지군사(知郡事)요. 치(穉)는 선전(宣傳)이니 *장방(長房)의 소생이요. 천서(天瑞)는 동지(同知)니 이방(二房)의 소생이요. 준(立+尊)은 전서(典書)요. 전(立+專)은 밀직(密直)으로 월성군(月城君)이요. 수(立+需)는 계림군(鷄林君)이요. 횡(立+갓없는宏)이니 3방(三房)의 소생이요. 원(援) ? 부(扶)는 다 부사(府使)요. 휴(携)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니 4방(四房)의 소생이다.

 

육(毓)의 아들은 정보(廷인변+甫)니 문과로 감사(監司)인데 청백리(淸白吏)에 들었고. 정석(廷碩)은 부령(副令)이요. 정견(廷堅)은 밀직(密直)으로 월성군(月城君)이요. 민(敏)의 아들은 정상(廷商)이요. 전(立+專)의 아들은 승적(升女없는嫡)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계림군(鷄林君)이며 시호는 공의공(恭懿공)이요. 유(立+인변없는儒)의 아들은 구적(具女없는嫡)이니 계안군(鷄安君)이요. 영적(寧女없는嫡)은 참판(參判)이요.

종적(從女없는嫡)은 사정(司正)이요.

  

흥적(興女없는嫡)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시호가 양희(襄僖)이고 영적(榮女없는嫡)은 부정(副正)이다.

 

원(援)의 아들은 현상(賢商)이니 참봉(參奉)이요. 혁손(赫孫)도 참봉(參奉)이요. 부(扶)의 아들은 원상(元商)이니 감찰(監察)이요. 종상(終商)이다.

 

휴(携)의 아들은 효상(孝商)이니 감찰(監察)이요. 효림(孝林)은 판관(判官)이다.

 

아! 공이 세 조정을 섬기어 직위도 높고 덕망도 중했는데 윤리가 무너지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세상에 뛰어나는 사업이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이 전함이 없으니 비록 한스러우나 그러나 제현(諸賢)들이 추중하여 말 한 것을 본다면 백대(百代) 아래에서도 족히 그 풍채를 상상할 수 있다.

 

신도(神道- 墓所)에 오히려 *현각(顯刻)이 없더니 후손 선(善)· 종원(鐘元)이 *가상(家狀)과 및 *방손(傍孫) 정승 유원(裕元)이 지은 전기(傳記)를 싸가지고 와서 병승(丙承)에게 주며 *명문(銘文)을 청하니 내가 어찌 그 글을 쓸 사람이 되리요. 

 

그러나 공의 평생에 *대절(大節)을 의논한다면 우뚝하여 중류(中流)에 서있는 *지주(砥株)와 같아서 일을 만나매 말을 다하여 험란하고 평이함을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덕이 후하면 흐르는 빛이 무궁함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후손이 번창하여 현달한 벼슬과 훌륭한 사람이 전후에 서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비록 *곽분양(郭汾陽)과 중산(中山)이라도 더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아름다워도 아름다운 척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정하여 줌을 알 수가 있다.

 

성대하고 빛나도다 마땅히 사기에 기록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선생(先生)이시여,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이네,
임금 보좌하기로 스스로 임무를 삼았으니, 나라를 위하여 몸을 허락하였네,
때로는 칼과 창을 더하여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네,
공(公)께서 소인(小人)을 배척하였으니, 군자(君子)의 굳센 의리이네,
소인이 참소 하였으니, 몇 해나 바닷가에서 병들었던가,
곤액에 처하여도 도(道)는 형통하였으니, 실지의 일을 구함 이었네,
대대로 왕명(王命)을 맡았으니, 꽃 같고 숲 같은 문장(文章)이네,
경연(經筵)에서 글을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 열어주었네,
믿부다. *중산보(仲山甫)여, 직책(職責)에 부지런하여 궐한 적이 없네,
아들같이 백성에게 사랑이 있고, 왕명(王命)을 *전대(專對)하는 이 끈기지 않았네,
크고 작은 그릇이 있으나, 재주와 영리함은 기뻐하지 않았네,
겉과 속이 완전하고 좋았으니, 정성이 말보다 앞에 있었네,
무거운 덕망을 업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니, 마음이 이치에 합하려 하였네,
퇴폐한 풍속을 진흥시키니, 그 처음을 생각하였네,
오직 공(公)의 지기(志氣)는, *풍뢰(風雷)와 같은 조화가 회포에 들어왔네,
만일 그 장점을 시험했으면, 음양(陰陽)의 닫고 열림 이루었으리라,
화평한 군자(君子)여, 하늘의 많은 부록을 받았네,
백천명(百千名)의 후손(後孫)이여, 만년(萬年)을 지내며 번창하리라,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나라를 붙잡으니, 빛나기 삼태성(三台星)과 같으네,
덕이 혹시 현달하지 않을가, 그 묘문(墓文)에 표시하노라.


선생(先生)이 돌아간 지 578년(五百七十八年) 병인(丙寅. 1926)년 4월(四月) 하순(下旬)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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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文彩)있고 영걸(英傑)하여- 원문에는 [비영(蜚英)]- 높이 나는 영걸. 뛰어난 사람
*고이는 사람- 원문에는 [폐인(嬖人)]- 아첨하는 사람.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교사(郊赦)- 중국에서 도성의 동녘 벌에서 봄 제사를 올리면서 여러 가지로 사면함.
천자가 하늘에 교제를 지내고 죄인을 사면하여 국경을 표시함.
*서연(書筵)- 임금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 경연(經筵)

 

*세 집의 다섯 장원

- 인정의 아들 부(木+인변없는傅. 成均魁. 登文魁)와 규(木+羽밑人밑터럭삼. 鄭可臣 榜),

진의 아들 관(琯-成均魁. 擢文魁)과 제현(齊賢- 成均魁),

세기의 아들 천(초두밑인변+靑. 成均魁)과 과(초두밑過. 榜) 등 6명이다.

 

여기에서 세 집은 성암공(휘 인정). 동암공(휘 진). 송암공(휘 세기)의 3집을 말하는데 다섯 장원은  족보에는 6손자가 급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 중 누가 장원이 아닌지?


(부. 규. 관. 제현. 천. 과)이다. 성균시의 장원은 4명(부. 관. 제현. 천)이고 방(榜)의 급제자는 2명(규. 과)이다.

 

*세과(世科)- 대대로 갑과에 급제함.
*백반(白飯)- 흰밥에 국과 몇 가지 반찬
*열반회(熱飯會)- 불교에서 석가의 입멸일(入滅日)을 기념하여 열리는 법회(法會).
*합부(合?)- 남편과 아내를 한 무덤에 장사함. 합장(合葬).
*장방(長房)- 장자. 여기서는 문정공(휘 경중)
*현각(顯刻)- 새겨서 들어낸 판각.
*가상(家狀)- 집안에서 내려오는 행적을 적은 글.
*방손(旁孫)- 직계가 아닌 방계(傍系)에 속하는 혈족의 자손.
*명문(銘文)- 금석(金石)이나 기물(器物) 따위에 새겨 놓은 글.
*대절(大節)-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큰 절조.
*지주(砥株)- 평탄한 그루터기. 뿌리

 

*곽분양(郭汾陽)

- 당나라 분양왕 곽자의를 말함.
어떤 사람을 일컬어 ‘곽분양 팔자다’라 하면 그가 곽분양처럼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란 뜻으로 통한다.
곽분양은 중국 당나라 때의 무장으로 본명은 곽자의(郭子儀, 697~781)다.
당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살아생전 온갖 부귀와 공명을 누렸다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곽분양의 다복(多福)한 인생을 주제로 한 그림(곽분양행락도)이 병풍형식으로 유행하였는데 이는 곽분양 같은 부귀영화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국당을 그에게 비유한 것이다.

 

*중산(중산)- ??? 미상
*중산보(仲山甫)- 주(周)나라 선왕 때의 명재상. 나라를 중흥 시켰다.
*전대(專對)- 나라를 대표하여 대답함.
*풍뢰(風雷)- 바람과 우레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국당공(菊堂公-李인변+초두밑靑)

 

◇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신유 8년- 1321년

  

우사보(右思補) 이천(李인변+초두밑靑)과 좌사보 왕백(王伯)에게 장형을 가하여 섬에 귀양보내었다.

 

폐인(嬖人- 아첨으로 출세하는 사람) 이인길(李仁吉)의 첩의 아버지인 서경낭장(西京郞將) 최득화(崔得和)가 수주(隨州)의 수령이 되자, 천(인변+초두밑靑) 등이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아니하니 왕에게 호소한 것이다.

 

 

◇ 고려사절요 제26권  충정왕(忠定王) 기축 원년(1349), 원 지정 9년

 

월성군(月城君) 이천(李蒨)이 졸(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