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파 - 상서공파
● 파시조 중조 17세 상서공(尙書公) 휘 과(초두밑過)
중조 17세 과(초두밑過)는 대파(大派)인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세계(世系)는 15세 열헌공(휘 핵)→ 16세 3남 송암공(휘 세기)→ 17세 3남 상서공 과 이다.
[벼슬은 상서(尙書)이다.
상서공은 재덕(才德)이 뛰어나고 문장(文章)이 세상에 으뜸이었다.
곤계(昆季-형제) 네 명이 연이어 대과(大科)에 오르니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칭송(稱頌)을 보냈다.
묘는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에 있다.
잊고 찾지 않던 동원(同原-묘소)을 무진(戊辰)년에 후손 유원(裕元)이 찾아서 돌보려고 굴험
(掘驗-발굴하고 살펴 봄)하였으나 확증이 없어 찾지 못하였다.
이에 단(壇)을 쌓고 비(碑)를 세웠다.
지금은 남북이 갈라진 고로 평택군 진위면 동천동(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산 166번
지) 참판공(參判公) 승(昇)의 묘 위쪽에 단을 모으고 비를 세웠다. ]
위 [ ]안은 족보에 기록된 내용이다.
○ 상서공전(尙書公傳)
- 외사씨 찬(外史氏撰)
상서공(尙書公)의 휘는 과(초두밑過)이니 신라 원신(新羅元臣)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요,
고려 명신(高麗名臣) 좌복야(左僕射) 호(號) 열헌(悅軒), 휘 핵(부수10획.격.솥력+羽)의 손자요,
예문관대제학 검교정승(藝文館大提學檢校政丞) 시호(諡號) 문희공(文僖公) 호(號) 송암(松巖) 세기(世基)의 아들이요.
문하평리(門下評理) 인정(仁挺), 임해군(臨海君) 시호(諡號) 문정(文定) 호(號) 동암(東菴) 진(王+眞)의 조카요,
동평장사(同平章事) 시호(諡號) 문효(文孝) 호(號) 국당(菊堂) 천(초두밑인변+靑), 부정(副正) 매(邁)의 아우요,
사인(舍人) 조(초두밑脩)의 형이다.
가락부원군(駕洛府院君) 호(號) 이암(怡菴) 관(琯),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호(諡號) 문충(文忠),
호(號) 익재(益齋) 제현(齊賢)과는 종형제가 된다.
상서공(尙書公)이 충렬왕(忠烈王)의 조정에서 벼슬을 했는데 왕이 친히 선비를 시험 보이매
동암(東菴)과 송암(松巖)이 연달아 을·병과(乙·丙科)에 합격하므로 사람들이 천장급제(天場及第)라고 불렀다.
송암(松巖)의 자제 넷이 연속하여 대과(大科)에 올랐는데
상서공(尙書公)이 가장 문장(文章)으로 현달(顯達- 지위와 이름이 함께 높아서 드러남)하니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세과(世科-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다)라고 하여 한때에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상서공(尙書公)이 가정 교훈을 이어 받아서 재덕(才德)이 넉넉했으나
사기(史記)에 일언일사(一言一事)도 보인 바가 없는 것은
공민왕(恭愍王)의 때를 당하여 세상일이 날로 변천함을 보고
산림(山林)에 물러와서 세상일에 간여함이 없는 까닭인가?
석구(石舊- 西漢 景帝때 사람)는 말하지 않고 몸소 행하며,
장안세(張安世- 西漢 武帝때 사람)는 너무 성대함으로 녹봉(祿俸)을 사양하여 모두 복을 남겨 두었다 하였으니
더욱 상서공(尙書公)의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이치가 있다.
찬사(贊辭)에 이르되
아! 아름답다. 상서공(尙書公)이여, 복이 따르고 덕도 높았네.
물러와 감추고 나아가 등용하였으니 우리 동방에 후손이 복을 받아서
아들과 손자에 내려오면서 대대로 음덕을 같이 하였네.
원선(元善)과 그의 자제 승(昇)은 인주사(仁州事)와 전농판관(典農判官)이 되었고,
연손(延孫)은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비로소 거룩한 가업(家業)을 이루었네.
숭수(崇壽)는 공의 현손(玄孫- 4대손)인데 세조 왕비(世祖王妃)의 이질(姨姪)이 되어 충심을 다 하였고,
철견(鐵堅)은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찬성(贊成)도 지내고 대장(大將)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정견(釘堅)과 석견(石堅)은 활을 잡고 북방(北方)을 정벌하여 4형제(四兄第)가 차례로 조정에서 이름 날리었네.
숭수(崇壽)의 자제 성무(成茂)는 안동판관(安東判官)을 지냈고
그의 셋째 자제 예신(禮臣)은 은덕의 높은 풍채가 있었다.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는 화암서원(花岩書院)에 배향하였고,
명장(名將)에 몽린(夢麟)이 있고 몽윤(夢尹)은 어린 세자 잘 도왔네.
몽량(夢亮)은 덕을 길러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고
그 자제 항복(恒福)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일등(一等) 공신이며 도덕과 강상(綱常)이 해와 별 같이 밝고 빛이 났네.
백사(白沙)의 셋째 형님 송복(松福)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었고,
두 자제 성남(星男) 정남(井男)은 선후에 걸치어 동인(銅印- 구리로 만든 도장. 기념장)을 찼네.
백사(白沙)의 맏형 운복(雲福)의 자제 탁남(擢男)은 역적 이인거(李仁居)를 토평(討平- 무력으로 쳐서 평정함)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 공신을 표창하던 문권文券과 쇠로 만든 표지)을 받았고,
몽윤(夢尹)의 맏손자 봉남(鳳男)은 경서를 공부하였네.
도적을 꾸짖어 굴하지 않은 이는 시중(時中)의 어진 배필이었으며 큰선비 시현(時顯)은 학술에 깊이 관통하였네.
호(號)가 기봉(騏峯). 이름 시성(時省)은 조행(操行)이 뛰어나고 뜻을 돈독히 하였으며,
시술(時術)은 이조(吏曹)에 있으매 한 시대에 명망이 높았네.
세장(世長)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어찌 진로가 막히었던가?
호(號)가 구천(龜川)인 세필(世弼)은 유문(儒門- 유학자의 가문)의 정학(正學- 올바른 학문)을 전공하였고,
양와(養窩) 세구(世龜)는 경술(經術- 경서(經書)에 관한 학문)을 행함에 공부하였네.
일문(一門)에 두 현인(賢人- 세필. 세구)이 세자(世子)의 사부(師傅)로 총명을 보충하였네.
효우당(孝友堂)으로 호를 지은 세희(世熙)는 어찌하여 운명이 궁박하였나?
수옹(壽翁- 世龜의 字)의 자제는 세상에서 운옹(雲翁- 光佐의 호)이라 칭하였네.
구천(龜川) 선생은 자제가 넷으로 복록이 많았는데,
큰 자제 태좌(台佐)는 완인(完人- 신분이나 명예 따위에 흠이 없는 사람)으로 정성이 왕실(王室)에 맺었고,
둘째 자제 정좌(鼎佐)는 부사(府使)인데 우애가 가득 하였으며,
셋째 자제 형좌(衡佐)는 판관(判官)으로 바로 도백(道伯- 관찰사)에 임명되었네.
가련하게도 영조(英祖)께서 세자상(世子喪)을 만나매 경좌(景佐)가 어린 세손 정조(正祖)를 가르치었네.
사문(師門- 先生의 門下)이 비운을 만나매 자기의 아픔과 같이하였네.
종성(宗城)의 사업(事業)은 바라보매 산악(山嶽)과 같이 높았네.
상하(上下)가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었으니 충정공(忠定公)과 문충공(文忠公) 부자 분이네.
종철(宗喆)과 종엽(宗燁)은 피폐한 백성을 사랑하고 구휼했으며
종적(宗迪)의 문장(文章)은 성균관(成均館)에서 자자하였네.
의리를 잡은 종백(宗白)은 6조(六曹)을 거쳐서 이판(吏判)이 되었고,
효자(孝子) 경일(敬一)은 종가(宗家)의 제사를 잘 이었으며,
3품(三品)직인 경오(敬午)는 어사가 되어 사방(四方)에 달리었네.
종철(宗喆)의 자제 경양(敬養)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선택되었고,
소종파(小宗派)에 경륜(敬倫)은 절의를 잡고 변방을 지키었으며
방지(傍支)의 양세(兩世)는 젊은 나이에 요절(夭絶)하였네.
시호(諡號) 효정공(孝貞公)인 석규(錫奎)는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하늘이 감동하였네.
진규(進奎)는 정문을 받았으니 오은근(鰲恩君)을 효성으로 섬기었고,
응규(應奎)와 형규(亨奎)는 차례로 대과에 올랐으며,
정규(廷奎)도 이어서 예조(禮祖)에 등용되었네.
경양(敬養)은 여섯 자제를 두었으며,
완규(瑗圭)는 몸을 조심하고, 형제들도 순량하여 황패(黃覇)와 공수(壟遂) 같았네.
문정공(文貞公)인 계조(啓朝- 錫奎의 子)는 영의정(領議政)에 증직 되었으니
효정공(孝貞公문정공(文貞公)을 다같이 정승의 예절로 받들었네.
종적(宗迪)의 증손 계우(啓宇)는 난대(蘭臺- 藝文館)에 종사하고
계선(啓善)은 동벽(東壁- 弘文館)에 들어갔으니 우리나라에 갑족(甲族)이 되었네.
선조(先祖)부터 한결 같았으니 올벼와 늦벼를 파종함과 같았네.
지금도 조정에서 성군(聖君)을 몸소 만났으니
유원(裕元)이 재상 지위에 올라 집안의 정종(鼎鍾)을 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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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鼎鍾)- 본디 정(鼎)은 고대 중국의 세 발 솥으로 왕위를 상징. 집안의 대를 이음. 솥과 종.
모두 종묘(宗廟)에 비치하는 기구(器具)로서 공신(功臣)의 공적(功績)을 새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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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裕膺)과 유석(裕奭)은 이조(吏曹)에서 쌍벽(雙壁- 兄弟가 훌륭함)을 이루었고,
유승(裕承)은 학사(學士)가 되어 집을 지으매 지붕을 이고 담을 바르듯 하였네.
이어서 조상의 업적을 지키었으니 오직 두터운 복을 받으리라.
성관(成冠)한 자가 많았으니 선비에 종적을 두었고, 동자(童子)들은 머리를 느리고 공부하는 모습 예쁘기만 하네.
*성관(成冠)- 어른. 다 자란 사람. 대인(大人). 성인(成人).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
낮에는 땔나무하고 밤으로 길쌈하며 봄에 밭갈고, 겨울에 글을 읽었네.
아름답도다. 우리 시조시여! 사적이 사기에 빛이 나네.
오직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뿐이 아니라 이조(李朝)의 문헌(文獻)에도 찬란하였네.
여섯 정승이 높고 높아 백성에게 혜택주어 휘장 두른 듯 하였고 두 번 깃발을 세웠으니
문형(文衡- 大提學)에 풍악 소리 쟁쟁하였네.
일곱 판서(判書) 나왔으니 서린 나무 뻗은 듯 하고 임금의 말씀 받아쓰고 글도 지어 일마다
혈성(血誠)을 기울이었네.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도원수(都元帥)가 많이 배출하매 각도에서 크게 바라보았네.
대장(大將)이 넷 나와서 진을 치매 벌떼 같이 모여들었네.
철모(鐵帽) 쓰고 갑옷입고 다섯 번 도적의 칼날 무릅썼네.
폐백을 싸 들고 산림(山林)에 찾아오니 흰 망아지 빈 골짝에 매여 있네.
여덟 분이 선생(先生)님 자리 열었으매 거문고 타고 글 외우는 소리 떠오르고
다섯 군데 사액(賜額)했으니 많은 선비 배출하였네.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이 위로 임금에게 들리었으니 정문(旌門)을 다섯 군데 받았으며 착한 자손들 왕성(旺盛)하였네.
더욱 번성하고 창대(昌大)하여 강하(江河)가 도도히 흐르듯 하였네.
원천은 하나에서 나왔으나 물 가닥은 종횡으로 갈라지었네.
자손(子孫)이 수천 명으로 계산되나 한결같이 선조의 발자국을 따랐네.
시(詩)와 예(禮)로 가업(家業)을 삼으매 외우고 익히어 화목하였네.
대대로 기지를 지키었으니, 많은 숫자 머리칼 같이 더부룩하였네.
천억년(千億年)을 내려가며 제사를 정성껏 받들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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