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 - 16 ◈ 신라 30대 왕 문무왕 혜종의 '무'를 피해 '문호왕(文虎王)'으로 표기되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성종의 휘 '치'를 피해 '자리통감(資理通鑑)'으로 표기되었다.[40] ◦수창궁(壽昌宮)은 창왕의 재위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그의 휘 '창'을 피해 수녕궁(壽寧宮)으로 불렸다.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와 아들로 몰려 왕에서 폐위된 뒤 폐가입진(廢假立眞), 왕이었던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왕과 창왕은 하루아침에 왕족을 참칭해 왕위를 찬탈한 대역 죄인으로 몰렸으니 昌(창)을 寧(녕)으로 고치는 피휘는 당연히 중단되었고, 그래서 조선 시대까지 가지 않고 바로 그 뒤를 이은 공양왕 때 수녕궁이 수창궁으로 원상복구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