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 - 16
◈ 신라 30대 왕 문무왕
혜종의 '무'를 피해 '문호왕(文虎王)'으로 표기되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성종의 휘 '치'를 피해 '자리통감(資理通鑑)'으로 표기되었다.[40]
◦수창궁(壽昌宮)은 창왕의 재위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그의 휘 '창'을 피해 수녕궁(壽寧宮)으로 불렸다.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와 아들로 몰려 왕에서 폐위된 뒤 폐가입진(廢假立眞), 왕이었던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왕과 창왕은 하루아침에 왕족을 참칭해 왕위를 찬탈한 대역 죄인으로 몰렸으니 昌(창)을 寧(녕)으로 고치는 피휘는 당연히 중단되었고, 그래서 조선 시대까지 가지 않고 바로 그 뒤를 이은 공양왕 때 수녕궁이 수창궁으로 원상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궁은 조선 시대에도 수창궁으로 불렸다.
◦ 고려 시대의 경산(慶山)은 1310년 이전까지는 장산(章山)이었는데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의 휘 장(璋)과 비슷한 글자를 피하기 위해 장산을 경산으로 고쳤다.[41]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백성들의 언어체계를 흐트리지지 않기 위해 잘 안 쓰는 글자,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지었기에 웬만해서는 자동으로 피휘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거나 직계가 끊겨 방계로 왕위를 얻은 왕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42]
하지만 이렇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리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어서 과거 시험 등에서 혹시라도 왕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당장 낙방에 곤장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43]
◦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서 아주 자주 쓰이는 성(成)자와 계(桂)가 조선 망할 때까지 봉인될 뻔했지만 본인
이 말년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고, 아들 정종도 방과(芳果)라는 이름자가 성(成)자 못지않게 쓰이는 한자라서 경(曔)으로 개명했다.[44]
이때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이라고 병립되어 쓰이던 지명이 그냥 아차산으로만 태조의 휘를 피휘해 쓰이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예외적으로 태종의 경우는 지명에 많이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생활 필수 한자 중 하나인 멀 '원(遠)'인데 죽을 때까지 이름이 이방원이었다.
개명? 그런 거 없다.
이것이 조선의 철혈군주의 위엄!! 만약 기행문 같은 것 잘못 썼다가는 으앙 주금 그래도 실록에 멀 '원'이나 '방'이 그럭저럭 쓰이는 걸 보아[45] 많이 통제는 하지 않았나 보다.
애초에 피휘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는 예기 단궁(檀弓) 하(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이름이 두 글자인 경우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휘하지 않는다(이名不偏諱, 夫子之母名徵在, 言在不稱徵, 言徵不稱在)고 했다.[46]
근데 아빠랑 형도 두 글자였는데 왜 굳이 바꿨을까? 즉, 피휘 규정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냐는 그때그때 정하기 나름이었던 것. 심하게 피휘할 때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이 비슷해도 금지하기도 하지만, 이런 구절은 일부러 왕의 이름을 고치지 않으면서 피휘의 불편도 초래하지 않을 근거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세민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