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 파시조

■ 대파 이암공파 파시조 17세 이암공 휘 관. 동암공 진)

녹전 이이록 2008. 12. 26. 19:02

■ 파시조(派始祖) 17세 이암공 휘 관(怡庵公諱琯)

 

 

동암공(휘 진)의 장자이다.

 

족보에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호는 이암(怡庵)이고 충렬왕 21년 을미(乙未. 1278)년에 성균관 문과에 장원하고 뒤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  

 

배는 합천 이씨 찬성(贊成) 신(信)의 손자의 따님이오. 상서(尙書) 존순(存淳)의 후손이다.

 

아들 수득. 복득. 천주 세 아들이 있다.]

 

* 다른 기록이 없음.

 

 


● 동암(東菴) 이진(李)


- 가락군 휘 관과 익재공 휘 제현의 아버지

 

1244(고종31)∼1321(충숙왕 8).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방연(方衍)이고 자는 온고(溫古)이며 호는 동암(東庵)이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사록(廣州 司錄)이 되고, 뒤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기용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을 때 둘째로 뽑혔으며,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군부 총랑(軍簿摠郞)에 전임(轉任)되고 1297년(충렬왕23) 우간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다.

 

그 뒤 대사성·밀직승지, 1303년(충렬왕29) 전법전서(典法判書)를 지내고, 1307년(충렬왕33) 판위위시사·권수밀직부사가 되어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됨으로써 정당문학(政堂文學)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림학사· 시우산기상시, 이어 좌승지· 비서윤· 지병조사· 사림학사가 되었으며, 뒤에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으며, 1315년(충숙왕 2) 과거를 맡아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충주(忠州) 도통사(道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이진(李王+眞)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百家-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많은 학자 또는 작자作者)에 박통(博通-온갖 사물에 널리 통하여 앎)하고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名聲)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운문韻文 형식의 시와 부賦-줄글)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왕의 좌우에 시종하는 자리. 중서문하성에서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종4품 벼슬)이 되었다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憁郞- 1275년. 충렬왕 1년에 시랑侍郎을 고쳐 부른 이름. 1298년- 충렬왕 24년에 다시 시랑으로 바뀜)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密直承旨)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2품 벼슬)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종1품)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齊賢)이 과거의 고시관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제현(齊賢)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奴婢)를 탈취(奪取)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學文)과 시(詩)와 술(酒)로 소요(逍遙)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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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 중조 3세로 고려 건국시 태조 왕건을 도왔다.
중원태수 호부랑중의 관직에 있었고 신라 경순왕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즉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의 3녀가 태수공(휘 금서)의 배(配)이다. 
 

*사록(司錄)-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에 설치되어 수령을 보좌하던 관원. 제술과 급제자가 초직(初職)으로 받는 정7품의 외직(外職)이었음.

속읍을 순찰하고 속읍의 행정을 감독하였으며, 주읍과 속읍의 향리들이 결탁하는 폐단을 방지하였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중서문하성에 속한 정4품 낭사 벼슬. 우간의 대부를 고친 것이다

*사림원 학사(詞林院學士)-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학사는 사림원에 속한 종3품 벼슬. 학사승지가 종2품이다.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사림원 문하부의 정3품관

*대사성 밀직 승지(大司成密直承旨)- 유학과 문묘의 관리, 의례(儀禮)·접대(接待) 등의 일을 맡아 본

정3품.

*전법판서(典法判書)- 고려 시대 법률(法律) 사송(詞訟)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전법사(典法司)의 벼슬 이름.
정3품의 품계로서 판사(判事) 다음에 해당함.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고친 이름임.

*상의 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 서무, 간쟁과 봉박을 관장. 내의성. 내사문하성. 중서문하성. 첨의부. 도첨의사사. 문하부.

*검교(檢校)- 고려 말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관직명 앞에 붙인 말.

*첨의정승(僉議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첨의우정승, 수시중(守侍中) 등 고려 시대 최고 중앙행정관청에서 일하는 부총리급의 관직.

 

 

○ 16세 동암공(東菴公)진(王+眞)

 

갑진년(甲辰年 1244 고종 3)에 태어나고 신유년(辛酉年 1321 충숙왕 8)에 돌아가셨다..

 

고려 충숙왕 때의 충신이시다.

 

중조 16세로 부(父)가 열헌공(悅軒公) 휘 핵(부수10획 솥력.격+羽)이며 차자(次子)로 태어났는데 평리공(評理公) 휘 인정(仁挺)이 형님이시고 아우가 송암공(松菴公) 휘 세기(世基)이시다.

 

초명은 방연(方衍)이며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이고 휘(諱-돌아가신 분을 높여서 부르는 이름)는 진(王+眞)이시다. 
 

시호는 문정(文定)으로 3한(三韓)공신 금서(金書)의 후손이시다.

 

일찍이 백가(百家- 여러 학자들의 저서)에 통하여 시명(詩名)이 알려졌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림원(詞林院)에 들고 광주(廣州)의 사록(司錄-정8품)을 지내고 직한림(直 翰林-검열을 달리 읽는 말 정8품)이 되었다.

 

충렬왕 때(庚辰年) 시부(時賦)로 문신들의 시험을 보아 9명을 뽑을 때 을과(乙科)에 제2위 를 차지하고 동생 세기(世基)는 병과(丙科)에 3위를 하였다.

 

이에 호를 천장급제(天場及第)라 하였으니 체모(體貌)가 번듯하고 생김생김이 우람하고 도량이 넓어(局量) 관대하고(寬) 널리 백가서를 통하여 많이 알고(弘博通 百家名) 시로 이름이 나고 어려운 운자라도 붓을 들면 곧 시를 지었다.

 

상서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기특하여 가로되 큰그릇이라 하였다.

 

이후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종5품)· 안동부사(安東府使-종3품)· 대사성(大司成-정3품) ·일지승지(日誌承旨-정3품)를 거쳐 충선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정2품) 상의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使司)의 찬성사(贊成事-정2품)를 역임하였다.

 

1298년(戊戌年)에 승지(承旨)직에서 출납으로서 사림원에 들어가 학사 박전지(朴全之), 오한 경(吳漢卿), 권수구(權水俱)와 같이 바르게 하니 왕의 총애가 각별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정승(檢校政承-예우차원의 형식적 벼슬)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피봉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신유년(辛酉年)에 돌아가셨으니 수(壽) 78세로 시호는 문정(文定)이시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들었고 실제로 세상에 행한 기록이 있다.(有實記行于世)

 

'시와 술로 사오' 라고 할 만큼 퇴관 후 선비, 중들과 시주(詩酒-시와 술)로 소일했으며 역옹(역翁) 휘 제현(齊賢)은 그의 아들이다.

 

묘는 우봉 도리촌(牛峰 挑李村-북한 개성 부근)에 있다.

 

첫 부인 배는 미상(配未詳)으로 아들 관(琯)을 두었다.

 

계배(繼配)는 진한국태부인 박씨이며 대능직 인육의 따님으로 (辰韓國太夫人朴氏戴陵直仁育 女-대능직: 참봉) 두 아들 제현(齊賢)과 지정(之正) 두 아들을 두었다.

 

* 큰아들인 장자(長子) 관(琯)은 이암공파(怡庵公派) 파조(派祖)이시고 4자인 지정(之正)은 호군공파(護軍公派) 파조이다.

* 차자인 체원은 스님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이진(李王+眞)-(21)

 

●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왕이 연등절(燃燈節)이므로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감(崔?)ㆍ박전지(朴全之)ㆍ오한경(吳漢卿)ㆍ 이진(李王+眞)에게 상승국(尙乘局- 궁중의 수레나 말을 맡아 보는 곳)의 안마(鞍馬- 안장 얹은 말)를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가 헌수(獻壽-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하였는데, 차례가 네 학사에게 이르자 왕이 '앞으로 나오라' 하여 술잔을 주고 이르기를, “오직 너희 여러 학사들은 바른 말을 하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 가죽 띠를 받다


시독학사 이진(李王+眞)과 시강학사 권영(權永)에게 붉은 가죽띠를 하사하였다.

 

왕은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네 학사와 더불어 정치에 관한 것을 상의하며 손수 주식(晝食- 점심밥)을 주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혹 밤중까지 이르게 되면 궁 안의 촛불을 내주어 집까지 보내 주기도 하였으니, 총애함이 이에 비길 데가 없었다.

 

*익재공의 아버지 동암공(휘 진王+眞)이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권한공 전송

 

삼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ㆍ전영보(全英甫)와 감찰 언부관(?部官)에게 명해서, 권한공ㆍ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

 

권한공은 상왕이 소중히 여기는 신하였다.

 

그때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王+眞)이 교외에서 전송하니, 한공이 말하기를, “천지가 비록 넓고 크나 한 몸을 감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진이 말하기를, “뒷간이 좋다." 하니, 한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검교 첨의정승 이진(李王+眞)이 졸(卒)하였다.

 

사람됨이 체격과 외모가 장대하고 의젓하며 국량(局量)이 넓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제현(齊賢)의 세력을 빙자하여, 남의 노비를 많이 빼앗았으므로, 식자들은 그를 하찮게 보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인물 중 경주 이씨

 

 

○ 이진(李王+眞) - 중조 16세(익재공 아버지)

 

 

널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시를 잘 짓는다고 명성이 났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와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익재난고 9권-下] 안겸재 진찬(安謙齋眞贊) 병서(竝序)

 

 

그 후 10년에 나의 아버지 동암공(東菴公. 이진李王+眞)의 호)이 과거의 고시관으로 있을 때에 겸재는 책(策)으로 응시하여 과거에 올랐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사귐이 가장 깊게 되었다.

 

*안겸재(安謙齋)는 안향(安珦)의 손자이다.

 

 

●  동문선 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 영가 향교 제생들이 차려주는 송별연에 시로 사례하며 [永嘉鄕校諸仙設宴送行作詩爲謝] - 이진(李王+眞)

 

괴시의 여러 선비들 송별연을 차렸는데 / 槐市諸儒敞別筵
화당 은촉에 밤이 길어 해와 같네 / ?堂銀燭夜如年
풍성한 배반이 분수에 넘치나 / 杯盤錯落眞非分
닐리리 현관 소리 마음에 흐뭇하네 / 絃管?洋最可憐
좌상의 석 줄 손은 옥처럼 맞 비치고 / 座上三行相玉映
술잔 앞의 일곱 자 시는 몇 구슬을 꿰었는고 / 樽前七字幾珠聯
무턱대고 마시니 곤드레된 선장객 / 飮狂解倒蟬腸客
덩실덩실 추는 춤에 여봐라 학배선아 / 舞巧誰呼鶴背仙
앉아서 다스렸으니 무슨 선정 있었던고 / 坐撫敢言嘉政化
굳이 만류하느라고 좋은 인연 노래 마소 / 挽留休唱好因緣
빈한한 서생들의 후의를 못 저버려 / 寒生厚意誠難負
주머니 돈 다 털어 냈네 일전 아직 남았구나 / 傾盡囊儲到一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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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永嘉) : 안동(安東)의 옛 이름.


*괴시(槐市) : 주대(周代) 성동(城東) 7리에 괴목(槐木) 수백 줄을 심어 수도(隧道)를 만들고 제생(諸生)들이 초하루ㆍ보름에 모여 물산(物産)ㆍ경전(經傳)ㆍ악기(樂器)들을 팔고 사기도 하며 괴목 아래에서 글을 토론했다. 《三輔黃圖》

 

 

◆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 산에 살면서 우연히 씀[山居偶題] - 이진(李王+眞)


공중에 가득찬 산의 푸르름이 사람의 옷에 뚝뚝 젖는데 / 滿空山翠滴人衣
풀이 새파란 연못에는 흰 새가 나네 / 草綠池塘白鳥飛
짙은 안개는 밤 동안에 우거진 나무에 엉겨 있고 / 宿霧夜棲深樹在
한낮의 바람이 안개를 불어 비가 부슬부슬 / 午風吹作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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