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흥조 중조 15세 열헌공(悅軒公) 핵(翮)
● 열헌공(悅軒公) 핵(翮)
자(字)는 만리(萬里)이고 호(號)는 열헌(悅軒)이며 초휘(初諱-처음 이름)는 타(駝)이다.
중조 14세손인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휘 핵에 이르러 3자 9손이 모두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으므로 열헌공을 경주이문(慶州李門)의‘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열헌공은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벼슬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인덕이 겸비하여 3대(본인, 아들, 손자)에 13명 중 5인이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니 충렬왕(忠烈王)은 황패(黃牌)를 내렸다.
열헌공(悅軒公)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인정(仁挺-評理公)·진(王+眞-東菴公)·세기(世基-松菴公)이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성품이 매우 엄하시었다.
인정(仁挺), 진(王+眞), 세기(世基) 등 아들 삼 형제에게 친히 서책(書冊)을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 장원(首席壯元) 시켰다. 공(公)은 문장으로서 동문선(東文選)에 들었다.
-------------------------*동문선(東文選)-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신라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시문(詩文)을 정선하여 엮은 선집.------------------------- 공(公)의 세 아들(三子)이 다 문관이 되어 문형(文衡-직제학直提學)을 맞고 다섯 손자가 성균(成均)에 장원으로 등제(登第-과거시험에 급제) 하였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가 훌륭하게 되니 이웃 사람들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였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의 묵헌(默軒) 민지 선생(閔漬先生)은 「꽃송이 같은 세 아들에 다섯 손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하였더니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悅軒)공은 평소에 적선(積善)을 하여 온 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를 보는구나.」라고 칭송하였다.
조문량(趙文良)이 지은 시에는 「부모를 모시고 제학(提學-대제학 아래의 정3품 벼슬)과 문형(文衡-대제학. 정2품)에 오른
것은 보고 듣기에 드문 일이니 어진이를 얻음이 도리어 옛 용문(龍門)보다 낫다」하였다.
또 이르되 「열헌의 기쁨을 어찌 형용하여 말할까. 사람들이 이르기를 새로 갑과(甲科)에 오르는 손 (孫)을 더해간다」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는 김해 김씨(配金海金氏)로 인정(仁挺)과 진(진)과 세기(世基)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배(配)이신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서사(書史-글과 역사)를 친히 가르쳐서 모두 세상에 크 게 쓰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장자 인정은 문과를 거쳐 고려 제1의 사간(司諫)에 이르고 차자 진과 계자 세기는 충렬왕 6년(서기 1280)의 친시(親試-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에서 각각 제2, 제3위에 올랐다. 임금이 황패(黃牌-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던 패)를 내렸으므로 세인(世人)이 이를 “천장급제(天場及第-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장(科場)에서 급제한 것)”라 하였다.
그 뒤에 인정의 아들 부와 규, 진의 아들 관(琯)과 제현(齊賢), 세기의 아들 천 등 5명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하니 세상사람들이 [갑과 손(甲科孫-갑과에 장원한 자식들)]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인정(仁挺)의 두 아들과 진(王+眞)의 세 아들과 세기(世基)의 네 아들 등 열헌공의 아홉 손자가 모두 문과에 등제하니 당대의 명유(名儒)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세과(世科 -대대로과거에 급제한다는 뜻)” 라고 극찬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주 이씨 가문이 고려의 현족(顯族-밝고 뛰어난 일족)으로 우뚝 선 것이다.
단(壇)은 전라도 고부(古阜)서쪽 연화봉(蓮花峰) 묘좌(卯坐)에 있다.
● 경주 이씨의 시조. 중시조. 중흥조에 대한 개념
우리 경주 이씨의 족보상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시조와 중시조와 중흥조를 각기 명확히 가리킴으로써 혼란이 없다는 것이다. 타 성씨의 대동보나 파보에 보면 시조도 여러 명. 중시조도 여러 명. 중흥조는 수도 없이 많이 소개됨을 볼 수 있다. 사전에 있는 뜻풀이와 같이 중시조와 중흥조의 뜻풀이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여 함부로 혼용하여 쓰고 있는 타성씨의 문중들도 많다. 우리 경주 이씨 시조님은 표암공 휘 알평 할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중시조님도 소판공 휘 거명 할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중흥조도 한 분 뿐으로 중조 15세 열헌공 휘 핵 한 분을 말씀하고 있다. 대종보나 파보의 소개글에 그렇게 명시를 하고 있다. 이로 보면 집안을 크게 일으키면 몇 사람의 시조도 되고 중시조도 되고 중흥조도 되는 여느 타 성씨에서 보이는 시조 중시조 중흥조의 개념과는 틀린다.
시조님과 중시조님은 여러 명이 될 수 없어도 중흥조는 여러 명일 수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중시조를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 - 중시조. 중흥조' - 중시조와 중흥조를 같은 뜻으로 본다. 그래서 그 뜻이 모호하고 흐릿하다. 그러나 우리 경주 이씨는 족보상에 시조. 중시조. 중흥조를 분명히 밝혀서 후손들이 조상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시조는 역사서의 기록상 증명이 되는 최초의 조상을 시조로 한다. 오랫동안 계대가 실전되어 세계(世系)를 모르다가 어느 시기부터 고문헌. 묘지명 등의 기록으로 나타난 지금의 후손을 잇는 첫 조상을 중시조로 한다.
계대가 이어지다가 훌륭한 조상이 많은 중에서도 가장 집안을 많이 번성케 하고 후손들이 높은 관직을 많이 가져 한 집안의 명예를 드높인 사람을 중흥조로 하고 있다. 어떤 종친들은 타 성씨들의 분별없는 중흥조의 뜻풀이를 근거로 우리 경주 이씨 중 익재공(휘 제현)과 백사공(휘 항복)을 가리켜 '중흥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상 익재공과 백사공 할아버님의 행적은 우리나라 국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훌륭한 분이고 우리 경주 이씨 조상님들 중에서 둘도 없는 훌륭한 조상님이시다. 그래서 두 분을 가리켜 타 성씨에서 말하는 '중흥조'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익재공과 백사공 할아버님은 당대가 아니면 다음 대에서 겨우 1-2명의 자손이 현달하지만 중흥조이신 열헌공(휘 핵) 할아버님은 2대에 3자 9손(三子九孫)이 모두 현달한 사실로서 중흥조로 하신 것이다.
다른 성씨에서 '중흥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경주 이씨에는 수도 없이 많지만 열헌공 할아버지 한 분으로 족하다. 중조 16세 평리공(휘 인정). 동암공(휘 진). 송암공(휘 세기) 등 할아버님과 익재공(휘 제현)과 국당공(휘 천)과 23세 창평공(휘 공린)과 8별. 25세 오재공(휘 탕)과 8정. 25세 백사공(휘 항복) 할아버님 같은 분들은 그 휘(諱)만으로 대파. 중파. 소파의 파시조뿐 아니라 여느 타성씨의 중흥조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위엄과 행적을 지니신 분들이니 이들 할아버님들을 모두 중흥조라 일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유독 15세 열헌공(휘 핵) 할아버지 한 분을 가리켜 중흥조라고 일컬음은 여타 다른 성씨들에게서 보여주는 중흥조의 남발을 막고 오로지 열헌공 할아버님의 위상이 다른 훌륭한 조상님들보다 우위에 있고 열헌공의 위엄을 높이고자 함에서 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시조는 표암공(문선공. 은열왕 휘 알평)이고. 중시조는 소판공(휘 거명)이며. 중흥조는 열헌공(휘 핵)인 이 집안은 누가 보아도 위계가 서 있고 질서가 확립되어 일사분란한 집안 체계로 보인다. 족보에서 시조. 중시조. 중흥조를 남발하면 어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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