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흥조

열헌공 묘단. 자제.손자의 장원과 하시.황패

녹전 이이록 2008. 12. 22. 11:25

● 열헌공(悅軒公) 묘단 설립(墓壇設立)

 

 

-평리 열헌공 사단비(評理悅軒公祀壇碑)- 안동 화산 권순명 찬(安東花山權純命撰) -  

 

[평리(評理) 이공(李公) 열헌(悅軒) 핵(翮)· 그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 차자(次子) 검교정승(檢校政丞) 동암(東庵) 진(王+眞)· 대제학(大提學) 송암(松巖) 세기(世基) 및 그 자제(子弟) 상서(尙書) 과(초두+過) 등 3세에 걸친 네 어른의 묘를 실전(失傳)하여 대신 단(壇)을 세웠다.

 

불행히도 세대(世代)가 오래되고 또 남북(南北)이 갈리어서 이역(異域)이 되었으니 자손들 중에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참배하여 그 성의를 베풀 수가 없다.

 

후손 상기(相祺)가 족형(族兄) 상준(相俊)에게 상의하여 말하기를 "따로 이남(以南)에다 단(壇)을 설치하여 천고(千古)에 맺힌 한을 푸는 것이 좋을 것이니 열헌공(悅軒公) 장자(長子) 평리공(評理公) 인정(仁挺)과 그 후손 진사(進士) 송탄(松灘) 원(黿)의 묘단(墓壇) 위에다 묘단을 설립(設立)합시다.

 

그렇게 하면 조손(祖孫)간에 서로 기맥(氣脈)이 통하고 응할 것입니다." 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봉(牛峰)은 서해(西海)에 임해 있는 현재의 금천군(金川郡)이니 거리가 천여리(千餘里)가 된다.

 

바람도 통하지 못할 정도이니 자손들이 그 지성(至誠)을 풀 수가 없다.

 

단(壇)은 고부(古阜) 서쪽 연화봉(蓮花峰) 묘좌(卯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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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리 열헌공과 열헌공 부부(15세 휘 핵)와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 *동암공(16세 휘 진)과 송암공(17세 휘 세기)과 상서공(18세 휘 과)의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 상기가 족형 상준과 의논하여 단을 세웠다. 

 

*동암공의 묘는 그의 손자이며 익재공의 셋째 아들인 밀직공(17세 휘 창로)의 묘소 위에 소재함이 묘역도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실전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의문이다. 

 

추측컨데 동암공의 묘는 뒤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다시 그 자리에 묘를 설치하였는데 아마 이 글은 묘지명 발굴 전에 쓴 글인 것으로 보인다.

 

우봉 도리촌의 묘단은 금천군(현 황해북도 장단군 십탄리 서원동)이니 거리가 천여리가 되어 바람도 통하지 못할 정도로 먼 곳이고, 세대가 1천여 년이 흘러가고 남북이 갈리어져 오고가고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남쪽의 자손들은 참배할 수가 없고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모시고자 하나 그 원을 풀 수가 없다.

 

해서 단(壇)을 후손인 진사 송탄 원(元+맹꽁이 맹)의 묘(墓)위에다 묘단을 설립(設立)하였으니 전라도 고부 서쪽 연화봉 묘좌이다.

 

 

◆ 열헌공(悅軒公. 諱翮휘핵)의 3자제(三子弟)

 

 

● 16세 장자 성암공(휘 인정仁挺)과 그의 아들

  

인정(仁挺)은 호를 성암(誠菴)이라 했는데 일찍이 문과에 장원하고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충렬왕 2년에 우정언(右正言-정3품)으로 있을 때 임금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함부로 벼슬을 주려하므로 서명을 하지 않아서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뒤에 누진하여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으로 있을 때에 공(功)이 없이 벼슬을 받는 자에게는 또 서명을 하지 않으니 임금의 미움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가 참지정사 이지저의 변호로 복직되었다.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공(公)은 굴강(屈强- 굽히지 않고 강함)하야 모든 사람들이 벼슬을 받을 때에 반드시 그 공과(功過)를 따져서 처결할 뿐 (왕명이라 하여도) 구차하게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불서고신(不署告身 -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는 일)으로 누차 왕의 미움을 샀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그 곧은 성품을 세상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의 차자 규는 덕원부사(德原府使)를 거쳐 우헌납(右獻納-정5품)에 이르렀는데 충숙왕 원년에 임금이

“상왕(上王- 충선왕)이 평소 총애하는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에게 벼슬을 내리려 할 때에 우헌납 이조은(李朝隱. 공의 호)이 서명을 해주지 않아서 조홀도(祖忽島)로 유배되었으나 이제 조은을 불러서 다시 벼슬을 주라.”고 하였다. 

 

공은 간원(諫院)에 있는 동안 위로는 임금의 잘못은 반드시 깨우쳐드리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간사한 작태를 억눌러서 아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부자가 모두 강직한 충신들로서 왕의 위엄에도 굽히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 16세 차자 동암공(휘 진)과 아들 익재공

 

열헌공의 차자 동암공(東庵公) 진은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시문(詩文)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둘째 아들 익재공 제현(益齋公. 齊賢)은 고려 말에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대정치가이고 학자이며 또한 시인이었다.

 
* 익재공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고 대파 익재공파 파시조로 소개함

 

 

● 16세 3자 송암공(휘 세기)와 아들 국당공

  

열헌공의 계자(季子-막내아들) 세기는 호가 송암(松巖)이었고 대제학을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정원외 임시로 늘린 벼슬. 사무는 보지 않음)에 이르렀고 그의 장자 국당(菊堂) 천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손 달충(達衷)은 감찰대부를 거쳐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팔관회(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밀직제학이 되고 신돈(辛旽)이 주살된 후에 계림부윤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국당공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고 대파 파시조로 소개하고 제정공(휘 달충)도 다음에 소개될 것임

 

 

◆ 열헌공(悅軒公)의 자제(子弟)

 

- 평리 성암공 전(評理誠庵公傳)에서 - ^외사씨 찬(外史氏撰) 

^외사씨(外史氏)- 사관이 아닌 사람.

 

[*고려조(高麗朝)에 미치어 핵(翮)이 있으니 호(號)는 열헌(悅軒)이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인 김씨(金氏)가 세 아들에게 친히 서사(書史)를 가르치어

모두 큰선비를 이루어 동국(東國)에서 이름을 떨치었다. 

 

맏이는 인정(仁挺)으로 호는 성암(誠庵)이다. 
 

문과(文科) 장원(壯元)으로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다음은 진(王+眞)이니 호는 동암(東庵)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 臨海君)이요,

 

다음은 세기(世基)이니 호는 송암(松巖)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 대제학(大提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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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김씨(金氏)가 세 아들에게 친히 ^서사(書史)를 가르치어 
모두 큰선비를 이루어 동국(東國)에서 이름을 떨치었다.


 

- 열헌공의 부인인 김씨가 인정, 진, 세기 등 세 아들에게 직접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가르치어 과거에 급제시켰고 큰선비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떨치었다.

 

^서사(書史)-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경서(經書)

 

-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 ≒경(經) ·경적(經籍).

《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대학》·《논어》·《맹자》·《중용》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사기(史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 ≒사서(史書)·사승(史乘)·사적(史籍)·사책(史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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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고려조에 와서 중조 15세 핵(열헌공)이 있다.
 

열헌공의 부인인 김씨가 인정, 진, 세기 등 세 아들에게 직접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가르치어 과거에 급제시켰고 큰선비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떨치었다.

 

맏이는 인정(仁挺)으로 호는 성암(誠庵)이고 문과(文科) 장원(壯元)으로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다음은 진(王+眞)이니 호는 동암(東庵)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 臨海君)이며, 다음은 세기(世基)이니 호는 송암(松巖)이고 검교정승(檢校政丞) 대제학(大提學)이다.

 

● 5손자(五孫子)의 장원(壯元)과 두 편의 하시(賀詩)

 

묵헌공(默軒公-민지閔漬)과 문량공(文良公-조간趙間) 두 분이 열헌공 손자들의 거듭하는 과거 급제의 자축 잔치에 참석하고서 느낀 바를 시로 읊어서 동암공(東菴公- 휘 진)에게 준 것이다.

 

○ 묵헌공(默軒公-민지閔漬)이 동암공(東菴公)에게 드린 하시(賀詩)

 

華(악)三家五榜魁 - 한 꽃받침 세 집에서 다섯 손자가 으뜸을 하니
人言皆是謫仙才 - 사람들이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
知公積善眞無敵 - 공(公)의 적선(積善)은 진실로 대적할 사람이 없구려
獨見年年慶席開 - 해마다 경사스런 잔치를 혼자서만 보게 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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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집- 성암공(휘 인정). 동암공(휘 진). 송암공(휘 세기) 형제의 세 집안

*다섯 손자- 성암공의 아들 장자 사인공(휘 부)과 차자 헌납공(휘 규). 동암공의 아들 장자 이암공(휘 관)과 차자 익재공(휘 제현). 송암공의 장자 국당공(휘 천)- 열헌공의 다섯 손자

*공(公)- 동암공(휘 진)을 가리킨다.


*장원한 손자는 5명이지만 나머지 4명의 손자도 다른 시험에 합격하여 모두 관직에 나감. 

 

○ 문량공(文良公- 조간趙間)이 동암공(東庵公)에게 드린 하시(賀詩)

 

具慶提衡(?)見聞 - 형제가 과거에 들어 집안 잔치를 연이어 엶은 드믄 일인데
得賢還勝舊龍門 - 어진 이를 얻는 것은 (이 친시(親試)가) 옛 제도보다도 도리어 낫구려
觴中酒可重重見 - 잔 속에 술은 거듭 거듭 채워지는데
堂上親皆兩兩存 - 당상에는 친 부모님들이 모두 쌍쌍이 계시는 구려
畿歲蘭蓀相容馥 - 난손(蘭蓀- 난초의 싹)같은 자손들의 향기 있기 몇 해이던가
一番桃李恰開繁 - 도리화(桃李花)한 번 피니 가문이 활짝 열리는 구려
悅軒喜氣那容說 - 열헌공(悅軒公)의 기뻐하는 모습을 어찌(임금께)아첨한다 하는가
人道新添甲科孫 - 사람들이‘갑과(甲科)의 자손’이라는 별명을 새로 붙여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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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시(親試)- 임금이 참석한 자리에서 보는 시험

*당상의 친 부모님들이- 성암공 부부. 동암공 부부. 송암공 부부.

*도리화(桃李花)- 복숭아꽃과 자두(오얏) 꽃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갑과(甲科)- 문과 복시 급제자에게 최종적으로 예조(禮曹)에서 시험을 보이고 1-3위 최고득점자 3명에게 준 등급.

 

첫째는 장원랑(壯元郞)이라 하여 종6품에 홍문관(弘文館) 벼슬을 주었고,

둘째는 방안(榜眼) 또는 아원(亞元)이라 하여 정7품,

셋째는 탐화랑(探花郞) 또는 담화랑(擔花郞)이라 하여 정7품의 품계를 주었다.


을과(乙科)는 4-10위까지, 병과(丙科)는 그 이하. 각각 정8품과 정9품의 품계를 주었다. 

 

*민지(閔漬)

 

- 생졸년은 1248(고려 高宗 35)∼1326(忠肅王 13)이다.

시호(諡號)는 문인(文仁)이고 자는 용연(龍涎)이며 호는 묵헌(默軒)이다.

벼슬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이고 작호(爵號-작위爵位의 칭호)는 여흥부원군(驪興府阮君)이다.

산수를 즐겨 금강산 유적사 사적기와 같이 금강산 등을 여행하였고, 북산산성에 그가 즐겼었던 민지암이 전해내려 왔던 것도 이러한 것을 뒷받침한다.


민지는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잃어버려 민지의 존재도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 편찬자로서의 민지는 빼어난 문인, 학자, 정치가이었다.

- 79세인 1326년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으로 세상을 뜨다. 

* 조간(趙簡)

 

- 생몰년 미상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이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랐다가 죽었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 과거 합격증 황패(黃牌)

 

평리 열헌공 사단비(評理悅軒公祀壇碑) - 안동 화산 권순명 찬(安東花山權純命撰)

 

[충렬왕(忠烈王)이 친히 시험을 보이매 *동암(東菴)과 송암(松巖) 양공(兩公-동암, 송암 두 분)이 다 선발되었다

 

왕이 *황패(黃牌)를 내려주어 총애(寵愛- 특별히 사랑함)하였다.

 

그 때 그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천장 합격(天場合格)이라고 불렀다.

 

*민 묵헌 지(閔默軒漬)가 시(詩)를 지어 찬양(讚揚)하였다.

 

'*華악三家五榜魁人言皆是謫仙才(화악삼가오방괴인언개시적선재)'
-꽃송이 같은 세 집에서 다섯 장원하였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이태백의 재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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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東菴)과 송암(松巖)- 중조 16세 동암(東菴) - 휘 진. 익재공의 아버지.
중조 16세 송암(松巖) - 휘 세기. 동암공의 아래 동생. 익재공의 숙부

*악 : 꽃받침 악 - 華악 : 꽃과 꽃받침 - 꽃송이 

 

* 황패(黃牌)- 고려 충렬왕 때에, 왕이 몸소 시부(詩賦)로써 초출(初出) 문신에게 시험을 보이고 급제자를 정하여 내리던 증서이다.

 

보통 붉은 종이의 홍패를 내리나 충렬왕에는 황색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천장 합격(天場合格)- 천장은 왕이 친히 참석하여 직접 보인 과거장이라는 뜻이다.


*민 묵헌 지(閔默軒漬)- 호(號)는 묵헌(默軒)이고 성(姓)은 민(閔)이며 휘(諱)는 지(漬)이다. 

 

○ 홍패(紅牌)

 

- 전시(殿試)·알성시(謁聖試) 즉 대과에 급제하면 붉은 바탕의 종이에 합격자의 성적·등급·성명 등을 먹으로 써서 그 증서를 홍패 즉 홍색지에 써 주었다.

 

홍패(紅牌)라는 합격증서를 주고「출신(出身)」이라고 불렀다.

 

<교지(敎旨>·어사화(御賜花)·삼일유가(三日遊街)를 주었다. 

 

○ 백패(白牌)

- 소과(小科)에 급제한 생원진사에게 주던 백지의 증서이다.

 

흰 종이에 관명(官名)· 성명· 과별(科別 : 생원·진사·잡과 등) 성적 등급(成積等級)이 적혀 있는데,

생원은 동편에 진사는 서편에 줄지어 서서 국왕에게 사배(四排-네 번의 절)를 올린 뒤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 받았다.

 

<교지(敎旨>· 어사화(御賜花)· 삼일유가(三日遊街)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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