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 - 15
◈ 삼국시대의 손휴
아들들이 혹시라도 즉위할 가능성에 대비해 그들의 이름으로 모두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썼다.
그런데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설레발이 되었다
◦ 청나라 강희제는 이름에 현(玄)이 들어가서 오랫동안 궁성의 북문의 이름으로 쓴 현무문(玄武門)이 신무문(神武門)이 되었다.
◦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조선은 피휘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의 이름은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로 외자 이름을 지었고, 만약 그렇게 이름을 짓지 않은 사람도 왕위에 오르면 이름을 고쳤다.
◈ 상세한 내용은 아래 한국의 사례 참고.
• 청나라 건륭제 시절에 출간된 고전 소설 홍루몽에서는 임대옥이 자신의 어머니 이름인 가민의 민(敏, min)을 피휘 해서 밀(密, mi)로 읽는다는 설명이 있다.
• 주원장은 억지가 좀 심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자기 앞에서 일절 옛날 일을 꺼내지 못 하게 하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 한국사에서 자국 왕[29]에 대한 피휘의 관습이 드러나는 건 신라 때부터로, 삼국사기를 보면 제32대 효소왕의 이름 김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
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개칭한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례를 보면 피휘제도의 원조인 중국 본토나 훗날 고려시대 등과 비교하면 아직 적응이 덜 됐는지, 필요성을 덜 느꼈는지 몰라도 피휘를 철저히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고대국가가 그대로 이어진 신라는 철저히 적용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신라 초중기 수십 명의 왕들의 이름은 한자 따위 들어오지도 않았던 시절부터 부르던 것으로 한자 표기가 고정되어있지도 않았고[30] 음에 맞춰 아무 한자나 써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데 쓰인 한자들을 일일이 다 안 쓰면 실생활에 쓸 수 있는 한자가 너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국 왕 이름에 대해서는 좀 느슨하게 적용하더라도 당나라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도였기에 당나라에서 시행하는 피휘는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간지의 하나인 병(丙)은 문무왕릉비에 경(景)으로 적혀있다.[31]
• 국가적 차원에서 군주의 이름을 피휘하는 관례는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다.
국왕 이름을 국가적으로 피휘하는 관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고려 시대엔 자비심이 없었는지 '륭(隆)'[32], '건(建)'[33], '무(武)'[34], '요(堯)'[35], '치(治)'[36] 등 자주 쓰이는 한자가 고려조 멸망까지 봉인 당했다.
따라서 륭(隆)은 풍(豊), 건(健)은 립(立), 무(武)는 호(虎), 요(堯)는 고(高), 치(治)는 理(리), 창(昌)은 녕(寧)으로어라? [37]
바꿔 써야 했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문헌에는 '무반(武班)'이 '호반(虎班)'으로 표기되었고, '무장(武將)'이 '호장(虎將)'으로 표기되었으며, 무(武) 자는 모두 호랑이 호(虎) 자로 표기되어있다. [38]
사신수 중에 호랑이만 2마리가 됐다.
호신정변 호신정권 호인시대 호신(드라마) 이것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쳐서 지금까지도 武의 훈음이 '호반 무'로 되어있다. [39]
태조, 성종의 경우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한자로 대체한 것이고, 혜종의 경우는 용맹한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연계하여 '호' 자를 '무' 자의 대체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 고려 3대 임금인 정종의 휘 요는 '요임금 요(堯)'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술된 단군신화 기사에서는 '요임금과 같은 때'라는 의미의 '여요동시(如堯同時)'가 '여고동시(如高同時)'로 표기되어있다.
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행동이다.
자국 왕명의 피휘를 위해 중국의 유교 성인이자 황제의 이름을 날려버린 것이다.
고려 성리학의 선구자인 이제현도 이 피휘를 지켰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반도의 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