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전주이씨의 뿌리

녹전 이이록 2024. 9. 21. 09:16

전주이씨의 뿌리

 

사이트에 올라온 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답변이 있으니 참고 하세요.

 

소문에 의하면 전주이씨가 경주이씨에서 분리되어 나왔고 고부이씨는 전주이씨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하던데 그게 맞나요?

 

)

 

1) 전주이씨가 경주이씨에서 분리되어 나왔나?

 

- 전주이씨 시조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선대 계대가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중국 기원설

야사(野史)에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어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중국 전래설은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성씨 득성 과정을 보면, 인물을 신격화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든 황실과 연관지어 위상을 높이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부여받기 힘든 것 같다.

 

경주 이씨 분적설

 

경주 이씨에서 갈라졌다고 주장하는 합천 이씨(陜川李氏)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이알평(李謁平)33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의 시조가 되었고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87년도에 간행된 경주 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참고자료로 올린 경주이씨 상세 실전 계(慶州李氏 上世失傳系) - 三十五代로 된 失傳世系를 보면 경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이 시조 이알평의 35세손으로 알려져 있고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과는 증조부(시조 33세 휘 )를 한 할아버지로 하여 항렬이 같아 재종형제(6)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 부터 이거명 까지의 계보가 1900년 이후 갑자기 발견된 점이나,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辰斗)를 거명하며 두()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으로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주장에 대한 신뢰성은 애매한 것이 많아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식 사료나 왕실 족보에는 경주 이씨와 관련성에 대해 언급되는 내용이 전혀 없고, 근대 이후 발간된 합천 이씨 족보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대에 창작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며, 전주의 토성(土姓)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로 중국 기원설이나 경주이씨 분적설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2) 고부이씨는 전주 이씨에서 분리되었나?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는 문헌공(文獻公) 이경조(李敬祖)로 고려 정종때 고부(古阜)에서 탄생하시어 문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서장고안(書狀官)이 되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송()나라에 다녀왔고 숙종 때 국자감 판사(國子監判事)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검교 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여산군(礪山君)에 봉했고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아직 어느 곳에도 전주 이씨에서 분적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