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문가 사람들의 특징은 뭔가요?
모 사이트에 올라있는 좋은 글을 복사하여 올립니다.
△ 뜨락
자녀교육법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10계명
‘아버지들이 앞장서 가르친 명문가 생활교육’
▼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
▼ 자긍심 있는 아이로 키워라
▼ 때로는 손해 볼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
▼ 스스로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라
▼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 세심하게 점검하여 질책하고 조언하라
▼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매니저’로 직접 나서라
▼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라
▼ 자녀의 ‘멘토’가 되라
▼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실천하라
△ jmh
가장 높이 생각해야 되는 것이 자녀교육입니다.
명문가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쓴 기사를 소개합니다.
<한국 최고 명문가 15곳의 특별한 자녀교육법>
명문가 교육의 진수는 뭐니 뭐니 해도 지식에 앞서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와 예의범절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한 것이다.
때문에 평소 쓰는 말도 여느 보통 집과는 달리 품위가 있었다.
경주 최 부자 집의 경우 매일 아침 조부에게 문안을 가서는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을 조부가 보는 앞에서 써야만 했다.
육연(六然)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방도를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체득게 해, 군자다운 행동을 하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육연을 통해 최부잣집은 그 자손이 대대로 올곧은 행실을 함으로써 수백년동안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릴 수 있었다.
부자가 3대를 못 가는 이유를 조교수는 최부잣집의 육연 같은 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3백 년 동안 만석꾼 지낸 경주 최부잣집.
경북 영양 조씨 집안은 박사만 14명. 조교수가 꼽는 명문가의 두번째 특징은 '부(富)와 귀(貴)를 함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문가는 '부'는 있으되 일정량 이상 취하지 않으며, '귀'는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으로 '이익이 생기면 홀로 취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
그 예로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3백 년 동안의 만석꾼으로 요즘의 재벌에 해당한다.
이 집안은 9명의 진사를 배출했지만 그 이상의 벼슬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이는 재산과 학문을 이용해 권세를 취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재산이 만석을 넘으면 상생(相生)의 원칙에 따라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로마 천년의 정신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혜택 받은 자들의 책임과 솔선수범)'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소작료를 다른 지주보다 반절 낮춰 받아 최부잣집의 소작을 얻기 위해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든 부당한 이익을 취한 바가 없다.
근세에 있었던 동학혁명에서도 활빈당원 들이 최 부자 집만을 '큰 어른의 집'이라며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명문가의 세 번째 특징은 '학문을 중시하여 뛰어난 인물이 많다는 것'.
"학문을 단지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 인간의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바꾸어주는 바른 생각의 샘으로 이용했지요.
때문에 명문가 중에는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권세가와 재산가보다는 학자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시인 조지훈의 고향이자 생가가 있는 경북 영양 주실 마을의 조씨 집안이 대표적인 예로, 산골의 한 작은 마을에서 배출한 박사가 무려 14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3인방으로는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 국민대 대학원장을 지낸 조동걸 교수,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 교수가 있다.
서울 안국동 윤보선 집안의 경우에도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국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진도의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1808~1893) 이래 5대째 계속해서 화가를 배출하고 있는 집안이고, 남원 몽심재의 죽산 박씨들은 원불교 성직자를 40명이나 배출했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명문가에서 자손을 생산할 때는 천. 지. 인 이 세 가지 요소를 지켜 신중을 기했다는 것. 명문가에서 합궁(合宮)을 할 때는 하지와 동지, 천둥 번개가 있는 날은 피하고 사주팔자에 의해 합궁일을 잡았다.
합궁 전에는 상스러운 것을 멀리하고 몸을 정갈히 했으며 합궁의 장소를 따로 두었다.
출산의 장소이기도 한 산실(産室)은 풍수지리에 의거해 집안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충만한 곳으로 잡고 외부인의 출입을 절대 금했다.
명문가의 네 번째 특징을 한결같이 예술을 가까이 하여 시(時). 서(書). 화(畵)를 즐겨했다는 것. 조교수가 이들의 고택을 직접 방문했을 때 집안에는 서화가 많고 이를 매우 소중히 하고 있었다.
가진 자와 상류층이 고급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예술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했던 명문가 사람들은 이 의무를 충실히 수행사기 위해 실제 예술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조교수가 명문가 연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기준 중의 하나는 지금까지 전통 고택을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구화와 산업화의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 현재까지 이러한 고택들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문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지금까지 고택을 유지하고 있는 집안이라면 당연히 역사성을 깊이 의식하고 있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문가의 기본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고택을 유지하고 있어야 진짜 명문가는 그는 [명문가 이야기]를 특히 현재 자녀를 키우고 있는 30~40대 연령층이 많이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의 미래는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되고, 이는 우리 전통 문화와 선비정신, 삶의 질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한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며 대개의 부모들은 오직 아이의 출세만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금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혼탁하고 질 낮은 삶의 방식을 우리만의 자존심과 고품격의 삶을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상류 사회라고 하면 무조적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던 우리 사회에 조용헌 교수의 연구는 부도덕한 졸부가 아닌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전통적인 우리 상류 문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