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가산사(佳山詞)의 익재 영정(益齋影幀- 肖像초상)

녹전 이이록 2021. 8. 14. 08:46

 가산사(佳山詞)의 익재 영정(益齋影幀- 肖像초상)

 

문화재 자료 164 

 

소재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 마을 가산서원 내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487번지 가산 마을에 위치한 가산 서원(佳山書院)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선생과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선생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가산서원이 세워진 경유는 1498(연산군 4익재의 5대손인 현감공(縣監公. 중시조 21세 낙안공 휘 계번의 차자

재인(在仁) 장수 현감(長水縣監)으로 재임시 종손(從孫- 형님인 尹仁 손자) (黿. 再思堂재사당- 창평공 공린의

아들팔별  셋째) 김종직의 문도로서 무오사화(戊午士禍)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었다.

 

이를 보고 현감공(縣監公재인(在仁) 누가 미칠까 두려워 벼슬도 버리고 익재공(益齋公) 영정(影幀) 모시고 낙남(落南- 남쪽으로 내려옴)하였다
 삼계면 백산촌(白山村) 집을 지어 영정(影幀) 봉안(奉安)했다

 

  1559 후손 대정(大貞) 사우(祠宇- 사당) 지어 백산사(白山祠) 하고 익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기둥이 썩어 사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1776 후손 언경(彦慶)이 낭월산 남쪽 기슭인 지금의 가산 마을로 옮겨 새로 사우(祠宇) 짓고 가산 서원(佳山書院)이라 이름 하였다

 

익재의 영정과 위패를 주벽으로 모시고 9 방손(傍孫) - 방계의 9대 후손. 익재공 17. 백사공 25. 세수로는 9(=9)이고 몇 세손으로는 8세손(=8대손) 백사공(白沙公- 항복) 배향 하였다

 

*방손(傍孫)- 방계의 손자. 방계의 후손으로도 읽는다.

이유는 익재공이 중시조17세이고 백사공이 중시조 25세이니 전 세수가 9(=9)나 된다.

조손 간(祖孫間)이라도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가 아니고 조상과 후손사이로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할아비 ''손자 '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조상을 의미하는 '자와 후손을 의미하는 '자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종 5(1868) 다시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 버림)되었으나 영정(影幀)만은 가산 마을 중앙에 새로 지은 영당(影堂)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때에 위패는 옛터에 묻어 지금까지 쌍분(雙墳)으로 전해오고 있다

 

1957 본손(本孫- 익재공 후손) 사람들이 옛터에 복원을 시작하여 1960 3 24 완성하고 매년 9월에 향사(享祀- 제사)하고 있다
가산사(佳山詞) 소장되어 있는 영정(影幀) 고려 충숙왕(忠肅王) 6(1319) 그렸던 원화(原畵) 의해 18세기에 이모(移模- 원그림을 보고 다시 그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이모본(移模本)이지만 안면(顔面- 얼굴) 처리나 의습(依褶-  입은 맵시) 표현 등이 원화(原畵- 본디 그림) 버금가는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산서원(佳山書院) - 장성

 

-소재지: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

-문화재 지정: 가산서원 소장 익재 영정

-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64(1988.03.16지정)

-배향인물 : 이제현(李齊賢). 이재인(李在仁). 이항복(李恒福)

-창건연도 : 1559(명종 14)

*향사일 : 9월 상정(上丁)

 

연혁)

가산서원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장수현감을 지낸 이재인(李在仁)이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로 종손자 이원(李黿)이 화를 입자 이제현(李齊賢)의 영정을 모시고 장성군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정자를 짓고 화초를 기르면서 후학들을 교육했는데, 그의 후손 이대정이 1559(명종 14)에 그곳에 백산사(白山祠)를 짓고 조상들의 제사를 받든 데서 시작되었다.

 

왜란을 겪으면서 집이 퇴락하자 후손 이언경(彦慶)1776(영조 52)에 낭월산 남쪽 가산에 옮겨 지으면서 가산서원이라 부르고 이제현(李齊賢)을 주벽으로 모시며 이항복(李恒福)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영정만을 모신 영당으로 남았다가 1960년에 중건하였으며, 1998년에 장성향교의 발의로 이재인을 추가 배향했고 익재의 영정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향일은 음력 810일이다.

 

< 배향인물 >

 

1) 주벽 이제현(李齊賢, 1287~1367)

호는 익재(益齋), 본관은 경주로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네 번이나 수상을 역임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려는 간신들의 음모를 막아 고려사직을 보전했다.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가서 만권당을 중심으로 조맹부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학문을 연찬했고 고려국사를 편찬한 역사가며 공민왕을 즉위시켜 고려의 자주정책과 원에 아부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하여 사대부 중심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했다.

 

학자이면서 시와 서예 및 그림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의 명성을 지녔다.

 

공민왕 사당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2) 이재인(李在仁, 1415~?)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며 호는 정헌이고 이제현의 5세손으로 김종직과 도의를 강론했고 장수현감을 지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종손이며 제자인 이원이 화를 입자 삼계면 백산에 은거하여 익재의 영정을 모셔놓고 화초정, 관개정을 지어 제자들을 길렀는데 아들로 순천부사를 지낸 공신 이조정랑을 지낸 공형(公衡) 그리고 이유인 남주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딸은 단종복위 거사로 살해된 봉여해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3)이항복(李恒福, 15561618)

 

호는 백사, 본관은 경주로 이제현의 일족인데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왜란 때 도승지로 국란극복에 공헌했으며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의 패륜을 비판하다가 함경도 북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2, 노사영언 魯史零言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