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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중시조. 파조. 유명 조상님의 업적 – 2

녹전 이이록 2020. 4. 28. 08:49

시조. 중시조파조. 유명 조상님의 업적 2



경주이씨 시조. 중시조. 익재공파 파조. 조상님 중 자랑스러운 분의 업적 등을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답변) 이이록


중시조


소판 이거명(蘇判 李居明)


소판공(蘇判公)은 신라 말엽 때 활동하였다


손자인 호부랑중공(戶部郞中公) () 금서(金書)께서 고려조에 중원태수(中原太守) 벼슬을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익재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문(墓地文)에 그 선대(先代)가 신라(新羅) 말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서 시조 이후(始祖以後)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先祖)가 되었기에 후손들이 중시조로 받들고 기세(起世)하여 1세로 하여 아랫대 후손을 헤아린다.


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蘇判公 諱居明)


蘇判이니 新羅官制蘇判秩有眞骨受之

(소판이니 신라관제에 소판질은 유진골이 수지라)

- 벼슬은 소판이니 신라관제에 소판의 차례 즉 품계는 오직 진골만이 갖는다.

 

唐令狐澄新羅記新羅 貴族謂之骨이라하다

(당 영호징의 신라기에 신라 귀족을 위지골이라 하다)

-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 신라 귀족을 이르되 골이라 하였다

 

始祖以下失系 故李牧隱 穡撰益齋墓誌只載蘇判以下하고

(시조이하는 실계 고로 이목은 색이 찬 익재 묘지에 지재 소판이하하고)

- 시조 이하는 계보를 잃어버렸으므로 목은 이색이 익재 묘지에 글을 지을 때 다만 소판공 이하만 실었다

 

大譜以公으로 爲遠代孫 而起 一世焉하다

(대보에 이공으로 위 원대손 이기 일세언하다)

- 족보에 이로써 소판공을 원대손으로 하고 1세로 하였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소판공(蘇判公)을 중시조(中始祖)로 문중사(門中事)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 때 소판(蘇判)의 벼슬은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직()이었다


따라서 시조 이후 실전(失傳)1000동안에도 다른 기록에 의하여 경주 이씨(慶州李氏)들이 대대로 왕족(王族)다음 가는 지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천자만손(天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를 통하여 과거급제자가 182, 재상(宰相)8, 정공신(正功臣)12, 청백리(淸白吏)10분 등 이 땅의 대표적인 명문거족(明門巨族)으로 성장했든 것이다


옛말에 이씨(李氏)는 모두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이씨 성(李氏姓) 중에서 사성(賜姓)의 으뜸 종문(宗門)으로서 합천. 차성. 우계. 진주, 원주, 재령, 아산, 장수 등의 이씨(李氏)는 모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적 종파다.

 

소판(蘇判)


소판은 관직명(官職名)으로 17관위 중 3관등 지방 수령직(地方首領職)이다.


신라시대 골품제도(骨品制度)인 진골(眞骨) 출신만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이다.

 

중흥조 중시조 15세 열헌공 이핵


() 만리(萬里)이고 () 열헌(悅軒)이며 초휘(初諱-처음 이름) ()이다


중조 14세손인 문하평리 열헌공(悅軒公 핵에 이르러 3 9손이 모두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으므로 열헌공을 경주 이문(慶州李門) ‘중흥조(中興祖)’ 받들고 있다


열헌공은 문하평리(門下評理) 벼슬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인덕이 겸비하여 3(본인아들손자) 13  5(송암공 세기사인공 이암공 익재공 제현국당공 ) 성균괴(成均魁)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충렬왕(忠烈王때는 ( - 東菴公) 세기(世基) 2.3위로 천장급제(天場及第)하여 황패(黃牌) 받았고 나머지 손자들도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열헌공(悅軒公)  아들을 두었는데 인정(仁挺誠菴公성암공)· ( - 東菴公동암공)· 세기(世基松巖公송암공)이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성품이 매우 엄하시었다


인정(仁挺), ( ), 세기(世基 아들  형제에게 친히 서책(書冊) 직접 교육하여 모두 수석 장원(首席壯元시켰다
 

() 문장으로서 동문선(東文選) 들었다.
 

*동문선(東文選)- 조선 성종  서거정 등이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시문(詩文) 정선하여 엮은 선집.
()  아들(三子)  문관이 되었고 세기(世基) 문형(文衡대제학大提學) 맞고  손자가 성균(成均) 장원으로 등제(登第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 12명이 훌륭하게 되니 이웃 사람들은 ''팔자 좋은 열헌(悅軒)''이라 부러워하였다


고려 충숙왕(忠肅王때의 묵헌(默軒민지 선생(閔漬先生) 
꽃송이 같은  아들에 다섯 손자가 모두 장원에 급제하였더니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을 닮은 재주라고 칭찬하였으며 열헌공(悅軒公) 평소에 적선(積善) 하여  세상에 알려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혼자서 매년 경사(慶事) 보는구나.라고 칭송하였다


조문량(趙文良) 지은 시에는 
부모를 모시고 제학(提學대제학 아래의 3 벼슬) 문형(文衡대제학2) 오른 것은 보고 듣기에 드문 일이니 어진 이를 얻음이 도리어  용문(龍門)보다 낫다하였다


 이르되 


열헌의 기쁨을 어찌 형용하여 말할까사람들이 이르기를 새로 갑과(甲科) 오르는 () 더해간다.하였다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추증(追贈)되었다


()이신 김해 김씨(金海金氏) 서사(書史글과 역사) 친히 가르쳐서 모두 세상에 크게 쓰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장자 인정은 문과를 거쳐 고려 1 사간(司諫) 이르고 차자 진과 계자 세기는 충렬왕 6(서기 1280) 친시(親試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에서 각각 2, 3위에 올랐다


임금이 황패(黃牌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던 ) 내렸으므로 세인(世人) 이를 “천장급제(天場及第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장(科場)에서 급제한 )” 하였다


 뒤에 인정(仁挺) 아들 (榑), (瑱) 아들 () 제현(齊賢), 세기(世基) 아들 (蒨)  4명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하니 세상 사람들이 ‘갑과 (甲科孫갑과에 장원한 자식들)’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인정(仁挺)  아들과 ()  아들과 세기(世基)  아들  열헌공의 아홉 손자가 모두 문과에 등제하니 당대의 명유(名儒도은(陶隱이숭인(李崇仁) “세과(世科대대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라고 극찬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주 이씨 가문이 고려의 현족(顯族밝고 뛰어난 일족)으로 우뚝  것이다() 전라도 고부(古阜)서쪽 연화봉(蓮花峰묘좌(卯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