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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세수’는 헤아려 읽거나 말하지 맙시다. - 1

녹전 이이록 2020. 4. 16. 09:11

시조세수는 헤아려 읽거나 말하지 맙시다. - 1

 

알평(謁平- 표암공) 시조이후 원대손(遠代孫)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까지 대수(代數)는 물론이고 선대조(先代祖)의 휘자(諱字)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하고 있다.

 

1613년경 광양현감(光陽縣監)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으니 백사 항복 (白沙恒福)선생께서 쓰신 서문(序文)만 전해 올뿐이며 다음해 1614년에 서계(西溪) 득윤(得胤 - 德胤) 선생이 수초(手抄)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가 청주(淸州) 거주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알 길이 없다.

그 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 1684)와 무진보(戊辰譜. 1748) 그리고 갑술보(甲戌譜. 1814)를 갑무갑 삼대보(甲戊甲三大譜)라 하고 우리 경이(慶李)의 근간보(根幹譜)가 되고 있다.


그 후 19세기말까지 어느 족보에도 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던 중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刊)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곤 2권 중 곤권 말(坤券末)에 귤산공(橘山公) 유원(裕元)선생이 쓰신 발문(跋文)삼가 안찰하건대 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西京. 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謄抄)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 (三韓)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蹟)이 아님이 틀림없다. - 유원(裕元)은 기록한다.라고 되어 있다.

 

[다음 ‘35세 실전세계(三十五世失傳世系)’라 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있는 것을 세밀히 탐찰(探察)한바 그 시발(始發)을 광무 8(1904) 갑진(甲辰)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35세로 된 실전세계가 19세기 말까지 전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경산군수(慶山郡守) 재직 중에 계필(啓弼)씨가 쓴 서술(敍述)을 보면 (광무 8년 갑진 발간) 후손 계필이 임인 (壬寅. 1902)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相駿), 춘우(春雨)가 옛날 간행본 한 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선생(瓢巖先生)이하 소판공(蘇判公)이상 35대의 대계가 쓰여 있는데 책이 헐고 좀 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추모(追慕)함에 있어 어찌 성력(誠力)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120년 전에 유원(裕元- 橘山公귤산공) 선생께서 28대 실계(失系)를 명시(明示)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려조 말(麗朝末- 고려 말)에 요동반도로 이거(移居)한 익재(益齋) 혈손(血孫)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본국 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거늘 갑술갑(甲戌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각 파보에 조차 19세기 말(世紀末)까지 한 곳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 1904년 경산군수(慶山郡守) 계필(啓弼)선생이 편간(編刊)한 것이 아닌가? 의혹도 되는 바이며 현재까지 나타난 기록을 추상(推想)할 때 결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으나 양 실전세계(兩失傳世系)를 그대로 등재(登載)하여 참고에 공(- 이바지)하는 바이며 다행히 후일에 고증(考證)이 발견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35대로 된 실전세계가 사실적이지 않은 이유


우리 경주이씨의 실전된 세계(世界)가 약 900년인데 이는 신라 초부터 신라 말 전 시기와 비슷하다.


‘35대로 된 실전세계에 기록된 조상님들은 모두 신라시대(신라 초 ~ 신라 말)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관직명이 신라시대 관직명이 아닌 대부분 고려시대나 중국 여러 왕조의 관직명을 인용하여 기록하였다.


 ‘35대로 된 실전세계가 게재된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1932) 이전에 합천이씨는 5차례(중묘 기축보-1529. 영묘 갑술보-1754. 순묘 신유보-1801. 고종 병자보- 1876. 고종 정미보-1907)에 걸쳐 파보를 발간하였는데 발간한 5차례의 파보에 이 실전세계가 한 번도 게재된바가 없다가 임신대보(1932)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북경(北京)에 주문사(奏文使)로 가던 이학영(李學榮)이 요동의 노변(路邊)에서 얻은 보첩 1권을 갖고 와 왕에게 허락을 얻어 이인명(李仁明)과 운운]


- 글에서 사신으로 가는 주문사(奏文使)’奏文使가 아니고 奏聞使가 바른 호칭이다.


경주인 이학영과 전주인 이인명은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실록(國朝實錄) 등에 이름이 고증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주문사(奏聞使)인 이학영(李學榮)의 명성과 사신 기록이 없고 이인명(李仁明)의 인명이 고증되지 않는다.   


‘35대로 된 실전세계가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등재된 것이 1932년이다.


그런데 경주이씨 무오보(1978)에는 이 실전세계가 이로부터 150년 전에 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대강 1830년경인데 그 동안 여러 번 발간된 족보 기록에 '35대 실전세계'가 한 번도 분적종 합천이씨 족보에 기록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후 1932년에 합천이씨 세보에 처음 게재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은 기록일 뿐이다.


거기에 귤산공(휘 유원)께서 ‘28대로 된 실전세계를 명시(明示)하였던 일이 120(1860년경)전이라면 귤산공 당시까지만 해도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전연 없었다는 말과 같은데 이후에 '35대 실전상계'의 발견 운운은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맞지 않은 일이다


경주이씨 갑자보(甲子譜. 1684). 무진보(戊辰譜. 1748). 갑술보(甲戌譜. 1814)인 갑무갑(甲戊甲) 3대보(三大譜)와 각 파보(派譜)에서는 1900년 이전까지 경주이씨 본파. 지파 어느 파보에도 '35대 실전세계'가 올라있지 않았는데 1932년에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1684년 갑자보 발간시기부터 1932년 임신대보에 처음 등재된 ‘35대 실전세계248년 만에 그것도 경주이씨 갑무갑 3대보와 8대파 여러 파보의 가문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고 분적종인 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되어 임신대보에 게재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35대로 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조상님들 행적 난에 기록된 관직명이 대종보 총편에 게재되어 있는 제목 [失傳世系(실전세계)考察(고찰)]의 논문 내용에서 기록된 관직명이 신라시대의 관직명이 아니라는 언급이 있었고 이 실전세계는 잘못된 계대이므로 이것을 참고로만 해야 한다는 논지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35대 실전 세계'에 올라있는 관직에 대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았다.


결론은 실제로 신라 시대의 관직명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고려시대의 관직명을 인용하거나 중국 여러 왕조(. . . 삼국. . . . 청 등)의 관직명을 인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 여러 왕조의 관직이나 고려시대의 관직을 인용하였으나 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고 조금씩 글자를 바꾸거나 글자를 빼거나 보태어 새로운 관직명을 만들어 표기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자 1자를 빼어 버리거나 1자를 보태거나 아니면 다른 글자를 대신 넣거나 두 관직을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관직명으로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직명을 만들다보니 중국  왕조의 관직도 아니고 신라와 고려의 관직도 아닌 관직명을 접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