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에서 잘못된 내용 수정 – 3
신라 6성에 대한 내용을 ‘경주이씨’씨족을 대표하여 경주이씨 유래와 역사를 정리해서 게재한다고 하며 모 종친님께서 장문의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글을 정리하여 올리시느라 노고가 크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3년 전 모 카페에 올라있는 이 글에 잘못된 내용이 있어 이를 지적하는 글을 올렸더니 얼마 후 원문과 필자가 지적하여 올린 글마저 삭제해 버렸더군요.
그 후 이 글이 벌써 몇몇 카페에 복사되어 올라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글이 복사되어 여러 카페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데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대로 믿고 알게 될 것으로 보여 잘못된 부분을 바르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다시 올려 드리니 참고 하기 바랍니다.
애를 써서 쓴 글이지만 후손들이 읽는 글이기에 잘못된 곳을 그대로 둘 수는 없어 이를 지적하여 바르게 알려 주기 위하여 3년 전 카페에 올렸던 원문의 글 그대로 올립니다.
본문은 앞의 글을 참고하고 잘못된 내용은 [.............]로 나타내고 아래에 ▲표 다음에 잘못 표기된 내용에 대하여 설명. 소견)을 드립니다.
9.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찾아 수록했고, 그 이후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이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失傳世系)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하였다.]
소견)
위의 내용도 무엇을 참고로 하였는지는 모르나 아주 잘못된 내용입니다.
‘28대로 된 실전세계’와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인물명은 시조와 중시조의 휘 외는 계대도 다르고 휘도 모두 다릅니다.
이 양 실전 세계의 계대를 참고하여 족보에 계대를 밝혀 수록한 양 말씀하셨지만 전연 이를 토대로 참고하여 수록한 내용이 없습니다.
28대로 실전세계와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잘못이 많은 계대로 중앙화수회에서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연 이 두 실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 두 계대를 참고하여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하였다함은 잘못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고 잃어버린 계대를 규명하였다.’ 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님의 행적 기록에
[初에 以成國太輔冢宰太宰로 爲攝政王師하고 延爲太史公하니 諡는 文宣恩烈王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 태보(太輔)는 아래의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백제. 발해 관직으로 신라 초 관직명에는 없으며 고려 때 관직명은 태보(太保- 정1품)이다.
* 고구려 사략 (유류왕) 해석에서
[十二月田于質山陰(綏化)五日不返太輔陜父諫之不聽罷爲司園小兄, 陜夫以瓢浮海入新羅.
- 12월 질산음(質山陰: 수화)에서 사냥을 했는데 5일 동안 돌아오지 않아 태보(太輔) 협부(陜夫. 협보)가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 직책을 파면하여 정원(庭園)을 관리하는 소형(小兄. 직책명)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협부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 四十四年乙酉二月 高婁太子太輔, 宋義右輔, 乙豆智左輔主兵大加.
- 44년(A.D.25) 을유년 2월 고루(高婁)태자를 태보로, 송의(宋義)를 우보로, 을두지(乙豆智)는 좌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총재(冡宰)- 중국관직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로 신라 초에는 없는 관직이다.
►태재(太宰)- 중국 벼슬(예- 吳나라 백비)로 신라 초 관직에는 없다.
►태사공(太史公) - 중국사학자 ‘사마천’을 달리 이르는 말로 사마천이 태사 벼슬을 한 데서 유래하며 태사령이라고도 하였다.
태사(太史)는 중국에서 기록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사관(史官)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없는 관직이고 고려시대에는 太師(고려 정1품)는 있어도 太史라는 관직은 없는 듯하다.
중국에서 사관(史官)을 太史라 불렀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빗대어 말했거나 아니면 太史公이 아닌 太師公의 오기(誤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으나 이 중요한 보첩의 기록에 시조님의 약력(略歷)을 기록하면서 잘못 기록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해서 총재(冡宰). 태재(太宰).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輔). 태사공(太史公)은 신라시대 초기의 관직이 아님이 분명하다.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輔)는 중국 관직이거나 고려의 정1품 관직이다.
고려시대(문종)에 정1품으로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는 있었다.
‘태보(太輔). 총재(冢宰). 태재(太宰). 태사(太史)’는 모두 중국식 관직명이고 태보(太保). 태사(太師)도 글자가 틀리나 고려 때 관직명으로 신라통일이전의 관직명에는 없는 관직명이다.
10. [14대파에서 파생된 소파(小派)의 수(243개 파)중 익재공파는 12개. 국당공파는 117개]
△ 대파. 중파 소파 수를 조사하여 올렸는데 이 자료는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제가 대종보를 보고 조사한 바로는 익재공파가 가장 중파. 소파. 지파 등 파명의 개수가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아래를 참고하십시오.
보기 : ■ - 대파. ● - 중파. ◇ - 소파. ▲ - 지파
■ 익재공파
●군수공파(장파) ●소경공파 ●판윤공파 ●참군공파
●창평공파 - ◇ 좌랑공파 ◇ 사미정공파 ◇ 재사당공파 ◇ 생원공파- ▲ 화곡공파
◇ 장육당공파 ◇ 참판공파 ◇ 진사공파 ◇ 한당공파
● 현감공파 ● 호군공파 ● 사헌공파 ● 묵암공파 ● 평시령공파
● 직장공파 ● 진사공파 ● 교리공파 ● 부사공파 ● 한림공파
● 청호공파 ● 밀직공파
■ 국당공파
● 문정공파(장파)- ◇ 사류재공파 ◇ 지퇴당공파 ◇ 석천공파
● 제정공파 ● 정순공파- ◇ 간옹공파. ◇ 경림공파 ◇ 정익공파
대강 대종보에 기록된 대중소파 수는 익재공파는 26개파이고 국당공파는 9개파 정도입니다.
물론 저의 통계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익재공파는 12개. 국당공파는 117개 파로 하는 것은 아직 어느 통계에서도 없는 수치입니다.
대파 중파 소파 지파의 분파에서 지금은 중앙화수회나 대종회의 승인과 인정이 있어야 분파되고 분파명을 갖게 되는 것으로 압니다.
옛날에는 호조의 인준도 있었다고 합니다.
종문마다 집안의 자랑이라고 마음대로 파명을 지어 부르면 기록에도 없는 파명이라 같은 종문끼리 혼란스럽기에 대종보 기록 외에는 함부로 인터넷에 올린다든가 하는 것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11. [성균제주(成均祭酒)]
△관직명으로 읽을 때는 ‘제(祭)’를 ‘좨’로 읽어 ‘성균좨주’라고 읽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 역문에는 모두 ‘좨주’로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왜 '좨주'로 읽는지에 대한 연유는 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관직명에 좌복야(左僕射)에서 ‘사(射)’를 읽을 때는 ‘야’로 읽고 사복시(司僕寺) 에서 역시 사(寺)는 관직명일 때는 ‘시’로 읽는 경우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