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 사적(蘇判公諱居明事蹟)

녹전 이이록 2008. 12. 17. 08:39

소판공 휘 거명 사적(蘇判公諱居明事蹟)

- 경주이씨세전보감(慶州李氏世傳寶鑑)에서

 

 

공(公)은 신라(新羅)에서 벼슬이 소판(蘇判)에 이르셨는바 신라관제를 살펴보면 소판(蘇判)은 영판(迎判)이라는 관명(官名)으로도 나타나 있는데 소판(蘇判)은 반드시 진골(眞骨)이라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진골(眞骨)은 왕족(王族)이라고 하였다.

 

- 신라관제(新羅官制)에는 문무(文武)를 구별하지 않고 대서발한(大舒發韓). 이찬(夷餐). 소판(蘇判). 파진찬(波珍餐). 한찬(韓餐). 벌찬(閥餐). 일길찬(一吉餐). 급찬(給餐) 등으로 불렀는바 소위 영판(迎判)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조(始祖)께서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세운 공(公)으로 찬홍공신(贊鴻功臣)이 되시어 철권(鐵券- 공신에게 나누어주던 훈공을 기록한 책)을 받았을 것이니 그 자손들은 마땅히 세록지가(世祿之家- 대대로 나라에서 녹을 받는 가문)로서 나라에서 골고루 그 자손을 보살폈을 것이니 자자손손(子子孫孫) 그 이름이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국사(國史)와 가승(家乘)에 기록되었으니 고려(高麗) 때 목은(牧隱) 이공(李公- 李穡 선생을 이름)께서는 지나간 모든 사실들을 익재묘지(益齋墓誌)에서 시조(始祖)를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이모(李某)라고만 하였고 그 후에 자기에 이르기까지의 소판공(蘇判公)이하의 역사만 기록하였고 소판공(蘇判公)이상은 알지 못하여 모두 빠져 있으니 신라 말(新羅末)에 사병(私兵)의 화(火)로 인하여 공(公)의 1대 전사(一代典祀- 나라에서 정한 제사)만 남고 모두 타서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씨의 족보(族譜)도 이에 따라 모두 잃어버린 고로 이제 우리 시조(始祖)의 성하신 덕(德)과 높은 공(功)과 빼어난 충성을 생각하니 계림 이씨(鷄林李氏)가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으로서 그 계통을 잃어 버려 흔적이 없다함은 어찌 슬프다 아니 하리요.
 

어떤 사람은 공(公)이전 시조(始祖)는 혁거세(赫居世)의 공신(功臣)이고 시조의 아드님은 태수공(太守公)이나 시조(始祖)이하 태수공(太守公)까지는 단 2세(二世)뿐으로 (시조 손자부터 소판공 이전까지의 계대는 흔적이 없으므로) 스스로 합당한 사정이 아니면 흔적이 없어 믿을 수도 없고 밝힐 수도 없는 바이다.

 

* 이기록에서 새로운 사실은 소판(蘇判)을 영판(迎判)이라고도 한다는 사실과

 

* '소판(蘇判)은 반드시 진골(眞骨)이라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진골(眞骨)은 왕족(王族)이라고 하였다'

라는 내용의 글이 '경주이씨 세전보감(慶州李氏世傳寶鑑)'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과

 

*'좌명공신' 이라고만 하는 줄 알았는데 '찬홍공신(贊鴻功臣)'이라고도 한다는 사실과

 

*'시조의 아드님은 태수공(太守公)' 이라는 글에서 시조 표암공만 기록(역사서)에 있는 줄 알았는데 2세인 아드님 태수공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휘는 알 수 없다.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 2세의 휘는 유(侑) 이다.

 

호칭은 사관존자(四觀尊者). 벼슬은 증 좌내사좌군주.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다.

 

위의 태수공(太守公)과는 다른 분이신 것 같다.  

 

이유는 시호 '문화공'이 있는데 ' 태수공'이라고 한 점과 '태수' 벼슬이 '좌내사좌군주' 보다 낮은데  '좌내사공. 좌군주공'이라 하지 않고 굳이 '태수공'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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