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 - 1
◈ 이주좌(李周佐)
경주이씨 대종보(慶州李氏大宗譜) 上系(상계) 중시조 6세에 좌사간(左司諫) 이주복(李周復)의 행적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시조 6세 좌사간(左司諫) 이주복(李周復)의 아버지는 정조시랑(正朝侍郞) 이승훈(李承訓)입니다.
○ 1세 중시조 ~ 6세 이주좌의 계대
1세 --→ 2세 -- → 3세 -→ 4세 -→ 5세 -→ 6세
소판공....병부령공...낭중공....병정공,,,시랑공...①좌사간공 ②상서공
거명.......금현..........금서.......윤홍.......승훈.......주복............주좌 – 아산이씨 분적시조
대종보에 기록된 6세 좌사간(左司諫) 이주복(李周復)의 행적에 이주좌(李周佐)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려 목종조에 좌우 보궐을 고쳐서 좌우사관하니 품계는 6품이다.
고려사에 이주좌는 경주인이니 목종조에 등제하여 관직이 형부상서라 하니 이로써 공의 형제이지만 보첩에 전하지 않는다. 】
● 행적 기록
생몰년은 ?∼1040(정종 6)이고 고려의 문신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현손인 중조 5세 승훈(承訓)의 차자(次子)로 형이 좌사간 주복(周復)이다.
가세가 한미(寒微-가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함)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동경유수(東京留守-고려 시대에 경주[동경]을 다스리던 벼슬. 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임명)로 있던 좌복야(左僕射) 이성공(李成功)의 천거로 국학에 입학하였다.
1008년(목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목 기실참군사(尙州牧記室參軍事)로 나아갔고 이어 감찰어사에 올랐으며 현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이때에 그는 삭방도내의 19현이 번적(蕃賊)의 피해를 크게 입는 지역임을 들어 조세의 감면을 요청하여 주민의 안주(安住)에 힘썼다.
덕종초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1040년에는 형부상서 판어사대사(刑部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형부상서로 죽으니 왕이 차와 의복을 내렸다
사공 상서우복야(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후손 이서(李舒)가 고려 고종∼원종조에 벼슬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판위위사(判衛尉事) 등을 지내면서 공을 세워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졌다.
그런 까닭으로 후손들이 경주 이씨에서 분적하여 주좌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서(舒)의 봉지(封地)인 아주(牙州)가 뒤에 아산(牙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산으로 하였다
* '고려사 절요'에 경주이씨로서는 기록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조상님이시다.
중조 6세 휘 주복 조상님의 동생이시며 분적종 아산이씨의 시조가 되신다.
●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경진 6년(1040), 송 강정(康定) 원년ㆍ거란 중희 9년
○八月,刑部尙書,判御史臺事,李周佐卒,周佐,東京人,家世單微,幼聰悟,留守李成功,一見器之,
秩滿,携至京,使肄業國學,登第,歷臺省,立朝,四十餘年,倜儻瓌偉,時稱得大臣體,及卒,王,悼惜,
贈司空,特令百官會葬
- 8월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 이주좌(李周佐)가 졸하였다.
주좌는 동경(경주) 사람으로 집안이 대대로 미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는데 유수(留守) 이성공(李成功)이 한 번 보고 그릇이 되었다 하여 임기가 찬[秩滿질만] 뒤에 데리고 서울에 와서 국학에서 글을 배우게 하자, 과거에 오르고 대성(臺省)을 거쳐 조정에 있은 지 40여 년에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뛰어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졸하자 왕이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사공(司空)을 증직하고 백관을 시켜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7상병진 고려 현종 7년부터, 계미 고려 숙종 8년까지 88년간 경진년 정종 6년(송 인종 강정(康定) 원년 거란 흥종 중희 9, 1040) - 안정복(安鼎福)
- 8월 형부 상서 이주좌(李周佐)가 졸하였다.
주좌는 동경인(東京人)으로 가문이 고단(孤單)하고 한미(寒微)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40여 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활달하고 우뚝하여 당시 사람들이 대신의 체통을 가졌다고 하였다.
졸하매 왕이 애석히 여겨 우복야(右僕射)를 증직하고, 쌀과 보리 4백 석을 부의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이행(李荇)
- 이주좌(李周佐)
목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부상서 판어사대사(刑曹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40여 년 동안 벼슬하였는데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이행(李荇)
- 고려 이주좌(李周佐)
목종(穆宗) 때에 과거에 올라 상주목(尙州牧) 기실참군(記室叅軍)에 등용되었다.
● 성종 15년 갑진(1484) 3월 27일 (갑인) 대신의 죽음에 백관이 회장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춘추전(春秋傳)》을 살펴보니, ‘대부(大夫)는〈죽은 지〉3개월 만에 장사지내되 같은 지위에 있는 대부가 회장(會葬)한다.’ 하였고, 후한(後漢)의 제준(祭遵)이 졸(卒)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백관(百官)을 보내어 먼저 장사시내는 곳에 모이도록 하고, 소복(素服) 차림으로 거가(車駕)가 임(臨)하였으며, 당(唐)나라의 위징(魏徵)이 졸(卒)하니, 조칙하여 내외 백관(內外百官)을 조정에 모이게 하고 모두 부상(赴喪)하게 하였고, 고려(高麗)의 강감찬(姜邯贊)· 이주좌(李周佐)· 최사추(崔思諏)가 졸(卒)하니, 백관(百官)에게 회장(會葬- 장례를 지내는 자리에 참여함.)하도록 명(命)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의정부(議政府)·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六曹)· 홍문관(弘文館)에 의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