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2수.휴전선

자! 가보자. 155Mile 휴전선으로

녹전 이이록 2008. 12. 9. 16:52

● 자! 가보자. 155Mile 휴전선으로!


(보이스카웃 육성단체 대표 안보교육 현장 견학을 다녀와서...)


'우리는 이제 민족의 원한이 맺힌 피 어린 육백 리를 밟아 보려고 길을 떠난다.

 

일각이라도 잊어선 안 될 민족의 정열과 의욕에 한 번 더 불을 붙이기 위해서 그 때문에 굳이 우리는 이 길을 떠난다.'

 

이 글은 이 은상 선생의「피 어린 6백리」에서 발췌한 것이다.

 

6월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 휴전선 근방에 흩어져 있는 민족상잔의 현장을 견학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현장을 통하여 우리의 안보상황과 대북정책 그리고 북한의 군사정책과 현재의 남북관계 등 안보에 관한 교육을 현장학습과 설명과 특강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연수의 목적이다.

 

한국 보이 스카우트 연맹에서 주최하고 각 지역연맹 별로 주관하는 육성단체 대표들의「통일을 위한 안보교육」연수이다.

 

묘하게도 우리들의 연수일자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북하는 일정이 일치한다.

 

연수 일정과 장소를 보니 중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휴전선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전적지를 견학하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어 처음 가보는 코-스에다가 보이스카우트 부산연맹 사상지구 위원장이라는 nick name 덕분에 참가를 신청하게 되었고 연수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전일 일찍 누워 자고 다음 날 눈을 뜨니 4시30분- 머리도 맑고 기분이 좋았다.

 

가방을 챙긴 후 조금 일찌거니 5시에 집을 나섰다.

 

6시에 부산진 역 앞에 집합하여 승차해야 하는데다가 늦게 가면 뒤쪽 좌석에 앉게 되어 3일 동안 여행하는데 조금 불편할까 싶어 앞쪽 좌석을 차지하기 위하여 일찍 집을 나선 것이다.

 

5시 30분경에 도착하여 몇몇 아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앞에서부터 오른쪽 6번째 좌석에 앉아 두리번거리는데 왼쪽 5번째 창문 쪽에 사범 여동기생인 B초등학교 박 교장이 앉아 있어 어깨를 툭 치며 "안녕하시오,"라고 인사를 하였더니 박 교장이 반갑게 자기 옆 좌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 쪽 좌석으로 오라는 것이다.

 

긴 3일간의 여행에 여자 분과 같이 앉아 여행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것 같고 학교 동기생이라 서슴지 않고 박 교장의 정중한 요청을 받아 들여 좌석을 옮겼다.

 

부산 연맹의 설 부연맹장께서 이른 아침에 단복 차림을 하고 배웅차 나오셔서 잘 다녀 오시라는 인사말을 하여 주었다.

 

몇 분(分)의 여유도 주지 않고 정각 6시에 차는 일정이 빡빡하여 연수 참가자 40명의 인원점검 후 곧바로 출발한다.

 

언양 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을 하기에 이곳에서 아침밥을 먹고 가는 줄 알았는데 화장실을 다녀오자 곧바로 출발한다.

 

아직 그렇게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차 안에서 랲에 싼 것을 1봉지씩 주기에 풀어보니 시루떡이 예쁜 색깔로 포개어져 먹기 좋게 들어있다.

 

하나를 풀어 박 교장과 반반씩 나누어 먹었다.

 

이 떡은 설 부연맹장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 훈육위원장님의 말씀에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떡으로 아침요기를 대신하였다.

 

하얀 색깔에 푸른 줄이 들어간 모자를 하나씩 나누어 준다.

 

뙤약볕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될 것 같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추풍령에 도착하여 10분간 휴식하고 엔진이 식기 전에 청주에서 중부 고속국도로 달리다가 경기도 이천 휴게소에서 또 10분간 휴식 후 계속 밀어붙여 7시간 만인 13시경 갈말(신철원)부근에 있는 명승지 고석정 근처의 식당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주린 배를 채웠다.

 

아침을 거르고 떡 몇 조각만 먹었더니 배가 무척 고팠다.

 

그래서인지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막 먹어 댔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철원군 관전리에 노동당사가 있고 그 앞의 너른 터를 주차장으로 하여 이곳을 집합 장소로 정하여 전국에서 모이기로 한 모양이다.

 

우리 부산 연수단이 도착하니 벌써 경남, 울산 대구 강원 경북 연수단이 미리 도착하여 노동당사를 구경 중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에서 연수단 전원에게 여행용 가방을 한 개씩을 선물을 주어 고마운 마음으로 잘 받았다.

 

역시 크건 작건 공짜로 주는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분이 좋은가 보다.

 

(구 철원군 노통당사. 화보에서)

 

노동당사는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모금과 노동력 동원으로 지어진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560평의 소련식 건물로 반공활동을 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곳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을 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포격으로 인하여 벽면이 크고 작은 구멍으로 숭숭뚫려 있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흉물스러운 모습이다. 

 

차량은 부산을 포함하여 6개 지역에서 울산지역 2대와 그 외 지역 각 1대씩 5대와 합하여 모두 7곱대가 같이 움직였다.

 

총 연수인원은 240명이었다. 

 

노동당사를 출발하여 백마고지로 향하였다.

 

6사단 안내장교가 군용차량으로 escort를 해 주었다.

 

백마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낮은 언덕에 산화한 백마고지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고 길 좌우 쪽에 사진과 그림으로 백마고지에 대한 역사를 알리는 전시관을 설치하여 놓았으며 낮으막한 경사 길을 50여m 더 가니 앞이 탁 트이며 북쪽 먼 저쪽의 산과 들판이 펼쳐 보인다.

 

왼쪽으로 백마고지가 있고 앞쪽으로 군사분계선이 보이고 비무장 지대가 보인다.

 

백마고지!너무나 귀에 익은 이름이다.

 

6.25사변을 이야기하라 할 때 백마고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해발 395m에 불과한 능선이지만 1952년 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뀐 곳이라 한다.

 

포탄 낙하가 30만발이고 중공군 사상자가 1만4천명이나 되었다는 곳이다.

 

쌍방간의 포격으로 산이 본래 모습을 잃고 그 뒤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단다.

 

대승을 거둔 9사단은 백마사단이라 명명되었다고...

 

(휴전선 남방한계선의 철책선 화보에서) 

 

휴전선은 멀리 서해(西海)밖에 떨어져 있는 교동(喬同)의 끝 섬(未島)에서부터 시작하여 동해의 어촌이었던 고성(高城)의 명호리(明湖里)에 이르기까지 구불구불한 도로 길이가 415㎞이니 1.000리가 넘는다.

 

직선거리로는 대강 우리의 거리 단위인 리수(里數)로는 600백리(里)이고 mile로는 보통 말하기를 휴전선 155mile이라고 한다.

 

육지에 설치된 철조망의 길이 다시 말하면 휴전선인 군사분계선으로 따져서는 250㎞이다.

 

황토색 흙 길을 따라 서해 끝 쪽에서 동해 끝 쪽지까지 철조망으로 그어진 선이다.

 

1953년 7월27이 조인된 휴전협정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남북을 구분하는 역사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없어도 될 철조망 선이다.

 

휴전 협정 무렵 대치하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남북 4km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를 설치한 것이다.

 

영어 약자로 DMZ 라고 한다.

 

비무장지대 남쪽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폭 5-20㎞에 이르는 지역은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민간인통제(일명 민통선)구역이다.

 

이 지역은 군 작전 및 군사시설 보호와 안보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과 귀농(歸農)을 규제하는 지역이다.

 

여정이 바빠서 곧 월정역으로 갔다.

 

경원선 철마(鐵馬)가 쉬어가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비무장지대 남방 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 지점이다.

 

역의 바로 맞은편에「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아래 6.25전쟁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그러낸 채 누워있어 분단의 한을 실감케 한다.

 

40여년을 고스란히 그 자리에 녹슬어 가고 있다.

 

월정역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에는 높이 3-4m의 높은 둑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고 둑 가운데를 뚫어 수색대가 비무장 지대(DMZ)로 나가 수색을 할 수 있게 문을 만들어 두었는데 오늘은 굳게 닫혀있다.

 

1998년에 건립한 4층 건물 위에 OP(관측 초소)가 있어 북의 동태를 관측하고 있으며 전망대와 휴게소가 2층과 3층에 겸하여 있는데 이를 철의 삼각지 OP 또는 월정 OP라고 한다.

 

이 OP에서 바라보이는 북서쪽에 중공군 3만 명, 아군 1만5천 명이 전사했다는 피의 능선과 김일성이 직접 3일 동안 전투를 지휘했다는 김일성 고지와 북한의 선전마을이 보이는데 오늘은 올라갈 수 없어 볼 수 없었다.

 

울산지역 연수단은 큰소리로 단체사진을 찍겠으니 모두 간이역으로 모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몇 번인가 이곳을 방문하여 본 사람들은 주차장 부근에서 심호흡을 하며 쉬고 있었다.

 

나도 이곳에는 동창회. 학교 친목회. 스카우트 지도자 훈련 때나 교감단 연수 등으로 4번은 다녀간 것으로 기억이 되어 힐끗 쳐다보고는 전망대로 올라가 구경이나 한다고 갔더니 화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쉬는 날을 택하여 전망대에서 3사단 작전회의를 개최하는데 예하(隸下) 각 부대장들이 이곳에 모여 지금 회의 중이라는 것이다.

 

헌병이 지키고 있어 전망대 계단을 한 칸도 올라가 보지 못하였다.

 

조금있다가 그냥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버스를 타고 멸공 OP로 향하였다.

 

산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시멘트 길을 걸어 올라갔는데 제법 경사가 가팔라서 숨이 찼다.

 

별로 높지 않은 낮은 능선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교육장으로 사용하는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비무장지대는 전에 무장공비가 자주 침투하여 여러 번 대간첩 작전이 전개된 곳이며 북한 쪽의 높은 오성산의 정기가 세어서 종소리로 그 기를 꺾는다고 전망대 옆에 종각을 설치하고 대형 범종을 달아 놓았다.

 

이곳 견학을 마치고 울산과 경남 연수단 100명은 15사단으로 가고 부산, 대구, 강원, 경북의 140명은 3사단으로 향했다.

 

1시간 이상 3사단 헌병 차의 선도를 받아 이 산허리 저 산허리를 감돌아 닿은 곳이 3사단 보충대에 도착하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쓰고 나왔다.

 

보충대란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신병을 임시로 받아 두었다가 3사단 예하 부대에서 필요한 병력 보충을 요청할시 주특기에 따라 보충해 주는 부대이다.

 

계곡 안쪽으로 위치한 부대로 작년에 있었던 홍수로 인하여 계곡 전체가 물에 휩쓸릴 때 부대와 부대 내의 시설과 풀장까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1년이 지난 이제야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계곡의 큰 돌을 위쪽 계곡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내려오고 있다.

 

공사로 인하여 버스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모두 내려서 짐을 챙겨 500m쯤 걸어 올라갔다.

 

막사는 3층 콘크리트와 블록으로 지었는데 1층에는 200여명 수용의 식당과 역시 200여명 수용의 소강당이 있고 취사장과 화장실, 세면실이 있고 이층은 내무반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도착 즉시로 내무반에 들어갔는데 인원배정이 안되어 있어 선착순으로 관물함 앞에 한사람씩 앉아서 자리를 잡다보니 한쪽에 10명씩 모두 20명이 정원인데 20명이 넘는 곳도 있어 ‘오늘밤 잠자리가 불편 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다행히 부대장이 16명씩 들어가도록 배려하여 인원을 재배정하여 주어서 일단은 조금 편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6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3사단장(소장)의 연수시간이 주어졌다.

 

3사단장은 52세로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작은 키에 말씨가 부드럽고 매-너가 세련되어 친숙미를 보이는 장군이었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 후 국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을 하였으며 전문성을 갖춘 지장에 가까운 장군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단장이 강의 중에 들려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사단장이 들려준 교육내용을 살펴보자.

 

현재 사병들에게 기합과 폭력이 없는 군대가 되도록 하고 있다.

 

어제도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상급 사병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였다.

 

사병 개개인의 고민을 살펴보고 해결해 주고 있다.

 

소대장과 중대장이 병사 가족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올리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3사단에서는 단 한건의 자살사건도 없었다.

 

북한의 포 사거리가 북방 한계선에서 쏘면 경기도 수원 아래쪽까지 가는 대포도 있다.

 

전쟁 발발 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울을 사수하려는 전략이 세워져 있다.

 

후퇴 시에는 1단계 2단계 3단계의 마지노선을 정하여 적과 대치하여 싸운다.

 

우리의 국산 장비의 성능이 매우 우수하다.

 

예를 들면 탱크(전차)의 경우 굴곡이 심한 들판이나 도로에서 탱크가 지나가면 요철에 따라 탱크의 몸통이 오르락내리락 거려 탱크의 포신도 몸통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여서 앞으로 달리면서 목표물을 명중시키기가 어려웠으나 국산 전차는 이를 개량하여 요철이 심한 곳에서라도 포신의 위치가 바뀌지 않고 목표물을 항상 향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 어떠한 요철의 땅에서도 움직이면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다.

 

OP에 근무하는 장교의 외출은 기혼일 경우에는 1주일에 한번이고 총각일 경우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의 외출을 허용한다.’

 

빠진 내용이 많이 있지만 대충 생각나는 것만 몇 가지 적어 보았다.

 

집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였더니 계곡이 깊어 통화가 불통이었다.

 

취침 전 TV를 보고 김 대통령의 북한 방문 소식을 들었다. 

 

캔 맥주 하나와 안주접시를 돌리기에 그걸 먹고 난 후 자리에 누웠는데 내 오른쪽에는 J교의 정 교장님이고 왼쪽이 N교의 박 교장님이다.

 

조금 있다가 한 사람 한 사람 잠이 들기에 나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어느 때쯤 되었을까?

 

누가 큰소리로 좀 떠들었는지 한 밤중에 계단 쪽에서 “좀 조용히 합시다! 모두 누워 자는데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금방 조용해진다.

 

다음 날 알고 보니 신경이 예민하신 G교의 강 교장님이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참지 못하고 떠드는 강원도 연수단원들을 큰소리로 나무란 것이다.

 

그 뒤 곧 또 잠이 들었고 코고는 소리에 잠시 잠이 깨었지만 듣지 않을 양으로 몸을 모로 돌려 누워 계속 잠을 청해 잠이 들었다.

 

매우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바라보니 날이 샐동말동이다. 

 

6시에 기상인데 모두 일찍 누워 자더니 충분히 잤는지 깨어나서 떠들기에 더 자고 싶었지만 떠드는 소리에 잠을 청하기는 틀렸고 일어나기로 작정하였다. 

 

떠드는 이유는 밤새 코를 골은 H교의 김 교장님에 대한 말이다.

 

코를 고는 소리가 매우 요란스러워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코고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었는지 세상모르게 단잠을 누워 잤으니 조금은 피로했던 모양이다. 

 

H교의 김 교장님은 사범학교 선배이시기도 하였는데 7-8년 전 정부에서 해외 연수 시켜 줄 때 중국과 일본을 같이 다녀 온 멋진 분이시다.

 

말씀도 잘하시고 술도 어지간히 하시고 우리 팀의 팀장으로 그 때는 교감의 신분이셨다.

 

일어나서 깔고 덮었던 모포를 옛날 군대생활을 할 때의 실력을 발휘하여 각을 지어 반듯하게 개어 정리해 놓았다.

 

화장실과 세면대에 갖다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화장실 변기 칸은 모두 변으로 채워져 있고 세수도 하지 못하여 부대 위쪽 계곡으로 올라가 세수를 하고 온다기에 나도 J교의 정 교장님과 함께 옛날 O교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재미있었던 이야기와 그 때의 선생님들에 대한 안부를 물으며 계곡 위쪽으로 올라갔다.

 

13년 전 O교에서 근무할 때 암으로 돌아가신 서 교장님과 현재 J교 교장이신 정 교무담당 교감님, 현재 O교 교장이신 김 생활담당 교감님, 그리고 교무인 나, 이렇게 4명이 단짝이 되어 교장님은 밤비(夜雨- 밤이면 언제나 내리는 비), 정 교감님은 꽃비(花雨- 꽃에만 내리는 비. 어느 여자에게나 내리는 비), 김 교감님은 단비(甘雨- 꼭 필요할 때만 달디 달게 내리는 비), 나는 봄비(春雨- 따뜻하고 포근하게 모든 님에게 내리는 비)의 별명을 갖고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이면 다대포에 가서 회와 소주를 시켜놓고 고스톱 판을 벌리며 즐겁게 생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여기에 끼이고 싶은 중견의 젊은 사람들이 많았으나 괜한 오해를 낳을까봐 다른 사람은 끼어 주지 않았다.

 

추억의 한 때를 생각하니까 무언가 마음 한 구석에 뭉클하고 치받치는 감정이 솟구친다.

 

이제는 그런 즐거운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

 

식사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더니 빵과 우유와 달걀과 잼을 배식하기에 밥을 안주는 이유를 물으니 물이 나오지 않아 밥을 짓지 못하여 대신 빵과 우유를 배식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던지 군대는 배만 채우면 되니까 이유없이 받아들이고 오늘 여정의 처음을 시작하였다.

 

헌병 차량의 escort를 받아 김화읍을 지나 말고개를 넘어 화천댐을 바라보면서 파로호 물줄기를 오른쪽으로 지나치면서 북상하여, 높디높고 길디 긴 해산령 꼭대기의 해산 터-널을 지나 한참을 더 가니 차 진행 방향의 왼쪽 절벽이 콘크리트로 덮여있는 곳이 보였다.

 

옆에 앉은 박 교장이 나를 툭 치면서 “저것이 평화의 댐인 모양이지?” 라기에 “저것이 어째서 평화의 댐이냐? 절벽에 콘크리트를 발라놓은 것뿐인데…….” 라며 핀잔주듯이 말하였더니 박 교장도 자기가 한 말이 잘못 말한 줄 알고 머쓱했던지 그냥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고 난 뒤 약 200m는 갔을까?

 

넓은 주차장이 보이는 지점에 오니 여기가 '평화의 댐'이라고 하면서 하차하라는 것이다.

 

지나온 길이 댐 위의 도로를 지나왔고 그 곳이 바로 '평화의 댐'이고 왼쪽 절벽의 콘크리트는 댐 옆의 절벽을 뚫어 물을 흘러 보내는 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해 놓은 것인데 박 교장이 웃으며 절벽을 가리키며 한 말이 정말 '평화의 댐'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내가 무안해져 버린 꼴이다.

 

(평화의 댐. 화보에서)

 

'평화의 댐'이 있는 강이 북한강 줄기로 물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금강산 쪽에서 흘러온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금강산 물줄기를 막아 금강산댐을 건설함에 따라 그 댐의 물을 가두어 놓았다가 일시에 터뜨리면 한강 수위가 높아져 서울이 물에 잠기므로 수공 및 천재지변에 대비하고 대응하기 위하여 전두환 대통령 시절 온 국민이 성금을 모아 1단계 댐을 완성한 것이다.

 

현재 별 효용가치가 없는 댐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난 97년과 98년 홍수 때 서울의 한강 수위를 줄이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데 ‘만약 북한에서 '금강산댐'을 터뜨린다고 하면 정말 서울이 물에 잠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부터 21사단 헌병 차의 escort로 21사단 백두회관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아마 휴전선 근방이고 교통도 별로 좋지 않은 지역에다 일반인이 경영하는 식당도 없고 해서 21사단에서 부근의 안보교육장이나 관광 명소를 일반인이나 군인들이 관광을 하고 난 후 백두회관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직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점심식사 후 버스는 높은 재를 넘는다고 힘이 들어 한다.

 

길이 가파른데다가 에어컨까지 켜고 달리니 힘에 부치는 것은 당연할 것 같다.

 

오천 터-널을 지나고 도고 터-널을 지나 '장가 고개'를 넘으니 강원도 양구군 해안분지가 나온다.

 

이곳이 유명한 펀치 볼(punch bowl) 전적지이다.

 

이곳의 정경을 보려면 을지 OP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을지 OP를 오르기 전에 좌측 산기슭에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해안분지 북단에서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구경하였다.

 

높이 1.7m, 폭 2m, 길이 2050m의 땅굴은 남방 한계선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4개의 땅굴 중 유일하게 내부 관람용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어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땅굴 입구 좌측편에 땅굴 수색작전 중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수중지뢰의 폭발로 『헌터』라는 군견(軍犬)이 죽었기에 그 넋을 기리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헬리곱터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다.

 

해운대 지구 J 교장님이 가까이 가서 헬리곱터를 만지려고 하니까 헌병이 만지지 말라고 소리친다.

 

곧 부셔질 만큼 낡았으니까 보기만 하고 손으로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어쩌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비행기를 밀었다가 찌그러지지기라도 한다면 변상해 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안보 교육관에는 영화관이 있어 20분간 상영되는데 내용은 땅굴을 뚫을 때의 여러 가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휴게실도 있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제4 땅굴의 위치는 지하 140m인데 다이어몬드가 박힌 굴착기로 비스듬히 하루에 12m씩 화강암을 뚫으면서 500m를 파내려 가서야 남침용 땅굴과 마주친 것이다.

 

남북으로 길게 파놓은 남침용 땅굴을 우리는 약간 경사가 지도록 하여 북한 땅굴의 허리를 정확하게 옆에서 관통하여 찾아낸 것이다.

 

남침용 땅굴까지 단단한 화강암 바위를 지름 3m의 다이어몬드가 박힌 굴착기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길이 500m를 뚫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한 바위를 6-7m의 큰 둥근 파이프 같이 굴을 뚫어 남침 땅굴과 연결시켜 놓았다.

 

지하 140m에 땅굴이 있다니까 이곳 산꼭대기나 능선의 높이가 대부분 1000m 이상이므로 실지는 1100m 아래에 땅굴이 있는 셈이다.

 

전동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240명을 전동차로 구경시켜준다면 한꺼번에 구경을 시킬 수가 없으니까 30명씩 구경을 시킨다고 해도 4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굴 깊은 곳까지는 구경을 하지 못하고 북한군이 파놓은 굴의 좌우만 살펴본 후 되돌아 나왔다.

 

1000m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북쪽 산 정상에 을지 OP가 위치하고 있다.

 

제4땅굴을 출발하면서 부산 연수단을 실은 차량이 여태까지 맨 뒤에서만 달려 왔는데 지금부터는 맨 앞장을 서서 달리기 시작한다.

 

도로를 따라 돌고 또 돌아 1000m고지를 올라가는데 버스는 죽을 맛이다.

 

도로가 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나 있어 해안분지 punch bowl의 경치를 보는 데에는 더없이 좋지만 왼쪽을 쳐다보니 천길 까마득한 절벽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는데다가 어떤 곳은 경사가 심하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차가 뒤로 밀린다면 ….’ 하는 잡생각에 오금이 저려 왔다.

 

조금 큰 돌을 아래로 던져 본다면 바로 곤두박질을 쳐서 저 아래 절벽에 부딪친다고 해도 800m이상은 굴러 떨어질 것 같다.

 

물론 돌은 산산조각이 날 것 같고……. 혼자서 오두방정을 떨다가 고개를 가로 저어 버렸다.

 

불행은 예감이 재촉하는 것이니 아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우리가 탄 차 뒤를 따라 오던 타 지역 버스 두 대가 부산 차를 앞질러 가기 시작하였다.

 

우리 차는 낑낑거리면서 그래도 숨을 몰아쉬며 해발 1047m의 고지를 향해 쉬임없이 올라간다.

 

이제는 해발 600m쯤 올랐을까?

 

처음 우리 차를 앞질러 가던 타 지역 버스 한대가 시들시들하더니 점차 속도가 떨어져 우리 차에게 추월을 허용한다.

 

각 지역마다 1급 운전기사에다 제일 좋은 차들만 대절하였을 텐데 결국 고지에 닿았을 때는 우리 부산 차를 두 번째로 추월하여 나간 다른 지역 버스가 산 정상에 먼저 닿았고 우리가 탄 차는 다음으로 테이프를 끊었다.

 

을지 OP는 평화 통일을 염원하며 금강산의 수려한 자태와 punch bowl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발 1047m에 위치한 최전방 안보교육 전망대이다.

 

해발 1000m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있는 타원형 분지로 화채 그릇 모양과 같다하여 6. 25전쟁 시 참전한 미국 종군기자에 의해 punch bowl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데 절벽 밑 분지의 넓이가 23km²이며 주위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석양 무렵 서쪽의 산 정상에 서서 분지의 가운데쯤에 위치한 마을을 쳐다보면 산그늘이 드리워지는데 산 그림자가 마을의 서쪽 가까이 오면 산 그림자가 마을을 떠받치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그 풍경이 화채 그릇(럭비공모양. 권투연습용 punch bowl 모양)에 빨간 열매를 올려놓은 모양과 같다고 하는데 매우 아름다운 경치라고 한다.

 

거기에다가 분지의 아래쪽에 안개나 구름이 끼었을 때 오른쪽 돌산령에서 바라보는 운무(雲霧)는 자연의 신비를 일깨우는 황홀경(怳惚境)이라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고 한다.

 

우리가 을지 OP에 오른 날은 날씨가 좋아 punch bowl 전경을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린 것은 대단한 운이었지만 구름이 없고 안개가 없어 아쉽게도 운무(雲霧)의 신비와 황홀경은 볼 수 없었다. 

 

두 가지 구경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OP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려 해안분지(punch bowl 분지)를 아래로 내려다 본 전경은 아주 거대한 화채그릇이나 풋볼이나 펀치볼을 콱 꽂았다 들어낸 모양으로 보면 된다. 

 

1000m의 높이에서 저 밑바닥까지 거의 직벽에 가깝게 내려 꽂치다가 아래쪽에 가서야 완만하게 흐른다고 상상해보면 그 전경이 조금은 떠오를 것이다.

 

뒤로 돌아 북쪽으로 바로 보면 높은 산이 보이고 그 산 아래가 비무장 지대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군사분계선에서 2km 북방에 북방 한계선을 설치해야하나 유독 이곳만은 염치 좋게 남쪽으로 800m쯤 더 당겨서 OP를 설치하였단다.

 

막사를 지어 놓고 산기슭에 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한다고 한다.

 

바라보이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오늘은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망원경으로 보면 금강산이 보인다고 한다.

 

왼쪽으로 선우 고지(938m)가 보이는데 53년 6월 25일부터 6일간 짙은 안개와 비를 무릅쓰고 중공군과 싸우다 수많은 국군용사의 생명을 잃어버린 격전지이다.

 

크리스마스 고지(1090m)도 있다.

 

52년과 53년에 각각 3일과 4일 동안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을 벌린 곳이며 엠원 고지는 53년 6월 10일부터 14일간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23차례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이라고 한다.

 

단장의 능선(894)은 51년 9월 13일부터 한 달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생명이 수없이 쓰러지면서도 적도 우리도 단 한명의 포로가 없었다는 것이 특징인 격전장이었다고 한다.

 

무언가 당기고 끌리는 마음이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바둑고개를 넘어 원통을 지나 내설악 북쪽을 거슬러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였던 백담사 입구를 지나쳐 미시령 휴게소에 잠시 쉬었다.

 

멀리 동해를 바라보며 숲에 쌓인 속초 시내가 한 폭의 그림같이 눈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곧 속초시에 닿았고 시 외곽에 있는 스카우트 잼보리 장 관망대에 올라가 구경하고 저녁 무렵이라 바닷가 횟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술과 안주로 목을 축이고 가까이 앉은 사람끼리 수인사도 나누며 즐거운 대화로 연거푸 마셨더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H교 김 교장님이 한 말씀 하신다.

 

“각 교육청 그림공부 대표들은 403호실에서 대회가 있으시니 모이시오”라고 큰 소리로 광고한다.

 

속초시와 척산 온천사이에 있는 금호 콘도에 여정을 풀고 피곤한 몸을 추스르기로 하였다.

 

방 두 개에 거실과 부엌이 있어 6명이 쉬기에는 너무 넓다.

 

403호실에는 만덕 중, 금강, 내성, 강동, 양운 초등 교장님과 나를 포함해 6명이 한 조로 짜여 오늘밤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되었다.

 

소주도 한잔해야 하고 그림공부도 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봉사활동에 일가견이 있는 내가 솔선하여 콘도 내 1층에 있는 슈퍼 마켓으로 내려가 소주 2병, 안주 다수, 그림책 한 질을 사서 올라 왔더니 어느새 정말 각 교육청 그림공부 대표가 몇 사람 모여 있다.

 

해운대 K 교장, B 교장, J 교장과 북부의 L 교장 그리고 서부의 J 교장이 그림공부 선수로 참가하였다. 

 

그림책을 던져주고 나는 소주병 뚜껑을 따고 잔을 돌리는데 두어 명 객꾼이 늘어 한잔씩 권하였더니 금방 술이 동이 났다.

 

식사 때 전주가 있었고 여기서 몇 잔을 마셨더니 약간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잠도 쏟아지기 시작하여 누워 자기로 하였다.

 

나 아니라도 손금 볼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도 금방 방으로 들어가 누워 잘 수는 없어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자니 M중학 교장님께서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신다.

 

나도 샤워를 하고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두 팔과 다리를 쭉 펴서 활개치듯 누워 그대로 잠들었다.

 

새벽 4시 50분경에 거실 쪽에서 말소리가 나서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가보니 엊저녁 모였던 다섯 분이 그대로 그림공부를 하고 있다.

 

밤새 한잠도 자지 않고 그림만 그렸던 모양이다.

 

체력이 모두들 대단하시다.

 

“아직까지 그림공부를 하십니까?”고 물으니 5시가 되면 끝마친다면서 빙긋이 웃으며 공부를 계속한다.

 

나는 소파에 누워 앞사람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해운대 J 교장님이 불쑥 “5시에 마치면 너무 일찍 마치는 게 아니가? 6시까지 하고 마치는 게 어떻노? 시간도 많은데…”라고 하니까 서부 교육청의 J 교장님도 조금 손해를 보았는지 맞장구를 치며 더 연장하는데 동의를 하는 것이다.

 

결국 6시까지 손금을 보기로 하였다.

 

한참 있다가 내가 “누가 장원을 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해운대 K 교장님이 “물으나 마나 아이가… 내가 아니면 누구겠노?” 라며 제일 신이 나 계신다.

 

다른 사람은 별 말씀 않고 그림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모두들 그림공부 매-너가 아주 좋다.

 

밤새 별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림공부만 하였으니 수준급이다.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떠들고 웃어서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였을 텐데…

.

내가 한 번도 깨지 않고 누워 잤다는 건 이 분들의 매너와 무관하지 않다.

 

사우나를 갔다 온 후 곧바로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운전대를 북쪽 방향으로 틀어 고성군 통일전망대로 향하였다.

 

이곳부터는 우리 부산 차량뿐이다.

 

다른 지역 6대의 차량은 모두 귀향길에 올랐다.

 

더 보면 무엇 하나? 라는 심경에 집으로 방향을 바꾼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부산 팀은 기왕지사 이곳까지 왔으니 마지막 목표지까지 못 간다면 말이 아니니 아직 이곳에 와보지 않은 교장님도 있어 홀로 바닷길을 따라 북상하였다.

 

제법 넓은 들이 펼쳐지는 곳도 있다. 

 

왼쪽으로는 산이 멀리도 보이고 가까이도 보이는 것이 연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동해바다와 나란히 길이 난 곳이 많아 동해의 푸른 물을 한껏 바라 볼 수가 있었다.

 

거진을 지나 조금 가다보면 왼편에 휴게소가 있고 안보 교육장이 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후 통일전망대로 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행스럽게 가는 곳마다 교육을 받았기에 이곳에서는 교육을 받지 않고 그냥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망대 몇 Km 앞쪽에서 마지막 초소가 있었고 헌병들이 모든 차량에 대하여 교육확인필증과 차량검색을 한 후 통과시키는데 우리 연수단 차량은 조금전 교육장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하고 억류(?)되었다가 10여분 뒤에 통과되었다.

 

전방 지역의 도로에서 특징적인 것은 도로 곳곳의 좌우에 집 한 채만한 콘크리트 장벽을 세워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勃發)시나 유사시에 폭파시켜 도로를 봉쇄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자 설치한 모양이다.

 

한참을 달려서 마지막 목적지에 닿았다.

 

깨끗하게 단장된 주차장이 앞쪽 얕으막한 언덕 아래에 있고 언덕 위까지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니 언덕 위에는 2층 구조의 건물이 있고 앞쪽으로 가니 오른쪽으로 동해의 푸르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 보이는 바닷가 쪽은 명사십리(明沙十里)이던가?

 

하얀 모래사장이 북으로 저 멀리 바위산까지 뻗어 있다. 

 

(고성 통일전망대. 화보에서)

 

고성 통일전망대는 1984년 세워졌다.

 

해금강이 한눈에 보이고, 금강산이 가깝게는 16km 멀리는 25km 정도 거리에 있다.

 

통일전망대는 실향민들에게 마치 고향을 찾은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왼쪽으로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이 북쪽으로 뻗어 있고 기차 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우리의 남방한계선이 철조망을 따라 황토 길이 선명히 나 있고, 북한의 북방 한계선에도 북한군의 초소가 녹음에 가려 있고 북한 병사들이 망원경에 잡히기도 한다.

 

짙은 녹음으로 덮여있는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이 그 뒤의 경치를 가로막아 버린다.

 

그 산 뒤쪽이 유명한 해금강 총석정이라던가!

 

중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먼 길을 오면서 곳곳을 들러 보았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전에 서부전선 부근을 3-4번 정도 가 봤을 때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방송소리가 북쪽 비무장지대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는데 지금은 일체 방송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김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해서 그런지 한번도 대남 방송을 하는 걸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조용한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다.

 

자! 또 출발하자! 부산으로!

 

부산까지 갈려면 여정을 빨리해야 한다.

 

화진포에서 조금 더 내려와서 선물용 황태(荒怠)를 몇 묶음 사서 버스 짐칸에 넣었다. 

 

연이은 산불로 인하여 통일 전망대부터 화진포까지 그리고 속초부근에서 몇 km 아래쪽까지 강릉 부근의 산 등, 산이란 산은 모두---. 

 

지나오는 동안 보이는 산의 거의 1/4 정도는 불에 타 버린 것 같다.

 

타 버린 많은 나무를 베어 버린 것 같은데..

 

그대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니 줄기는 불에 타서 검고 가지도 가지마다 벌건색이다.

 

‘조금만 조심하면 아름다운 산천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속초시에서 여정 마지막 식사인 점심을 먹고 12시 30분에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는 저녁 9시경에 도착한다고 한다.

 

일로 남쪽을 향하야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데 앉은 좌석이 좌측이라 동해의 바다 구경은 싫증이 나도록 구경하였다.

 

정동진은 완전히 관광 명소가 되어 관광객이 밀려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하여 모래시계를 보려고 다리위로 가는데 조금 전까지 다리 위를 다른 사람이 건너오는 걸 보고 갔는데 수리 중이라고 하면서 저 아래쪽을 돌아서 가라는 말에 구경하는 걸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전시된 북한 잠수정. 화보에서)

 

강릉부근을 지나가면서 북한의 잠수정을 구경하였다.

 

1998년 김 전 대통령이 포용정책으로 햇볕정책을 쓸 대 북한에서는 강릉 바닷가로 잠수정을 침투시켰다.

 

그물과 암초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택시 기사의 신고로 포획된 잠수정이 바닷가 육지 쪽으로 옮겨져서 전시되고 있고 그 아래쪽에 우리 해군의 퇴역함정인 전북함을 육지로 끌어 올려 같이 전시해 놓았다.

 

통일공원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4만 2천여평의 터에 들어선 통일안보 전시관이다.

 

극난 극복사, 아 6.25, 매직버젼, 침투장비 전시, 이산가족찾기, 통일환경의 변화 영상실, 정보검색 코너 등의 전시실을 갖추었다.

 

울진 근방에 와서 바닷가에 있는 촉대암(촛대바위)과 만물상 구경을 하였다.

 

규모가 작다 뿐이지 제법 기기묘묘(奇奇妙妙)하다.

 

영덕을 지나 포항근처에 오니 어둠이 덮이기 시작하였다.

 

속초에서 점심으로 마지막 식사를 하였는데 하 훈육위원장님이 부산 도착이 너무 늦으니 경주에서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하여 경주에서 쌈밥과 된장으로 배를 채웠다.

 

노포동에서 일부 연수자들이 하자파고 무사히 목적지인 부산진 역 도로변에 도착 하니 10시30분이었다.

 

2박3일간의 연수에 얻은 것이 많다.

 

보람 있는 연수였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스카우트 연수에는 버스에서의 놀이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조용히 산천을 구경하고 조용히 명상하고 상상하고 수면을 취하고....

 

부담이 없어 좋다.

 

취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굴리고 하는 놀이문화가 없다.

 

연수나 관광 문화가 많이 변하고 있다.

 

마시고 취하는 것은 숙박지에서 기분을 풀어버리고 차내에서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 마시고 노래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3일간의 연수에 많은 시간을 차안에서 지냈지만 운전기사가 틀어 놓은 테잎에서 흘러나온 트롯트 몇 곡을 들은 것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내 집만한 곳이 없고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참 좋다.

 

무조건 좋다.

 

항상 느끼지만 아기자기한 우리의 산야(山野)가 그럴 수 없이 좋다.

 

저 등성이를 넘어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별다른 세계도 아닌 엇비슷한 풍경인데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아직 가 볼 곳은 많다.

 

또 떠나고 싶다...

 

1999. 6.18.


(낙산사 해수관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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