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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 - 2

녹전 이이록 2024. 11. 13. 08:20

족보 -  2

 

좋은  내용의 글로 복사하여  올립니다.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왕대실록이니 원록(源錄)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 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후한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높아져서, 이때부터 족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위((남북조(南北朝)에 있어서는 제가의 족보를 수집 심사한 뒤에 이것을 갑을의 문벌로 구분하여 세족이 아닐 경우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 에 이르러서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학력과 인물을 주로 하는 과거제도가 행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천거(薦擧)의 표준으로서 문벌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 성격을 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의 관리 선발의 추천 자료가 됐고, 동족의 수족(收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시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려 사회는 문벌귀족의 형성으로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 및 출세의 제한은 말할 것도 없고,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족보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배경과 성격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권문귀족(權門貴族)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행렬(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항렬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문종(文宗)때에는 성씨· 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國初) 부터 족보의 편성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 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성족(姓族)파별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동파(同派동족(同族)의 일치단결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실의 계보록이 중요시 되어 원계보(源系譜)종실보첩(宗室譜牒)이 그후 여러 차례 수보(修補)되었으며, 귀족 · 권문에서도 수보 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어느 성씨의 족보가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마디로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 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라 알려지고 있다.

 

이 문화유씨 족보는 1522~1566(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만한 것은 안동권씨의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성화보(成譜)는 성종(1476)때인 명나라 헌종 성화 12년에 간행된 것으로, 문화 유씨의가정보(嘉靖譜)보다 약86년 앞선 셈이다.

 

안동권씨 측의 말에 의하면 안동 권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사시(四始)라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첫째로 꼽고 있다.

 

그런데 문화 유씨 가정보(嘉靖譜)서문 가운데는 가정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년간(永樂年間)- 세종 5년 계묘(癸卯)에 이미 문화유씨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영락보가 과연 간행본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여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족보는 당시 계급사회의 산물로 안동권씨보 · 문화유씨보 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명족의 족보출현이 다른 문중에서 족보를 만드는데 모형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족보 보다는 가첩이나 가승이 오히려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후 족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중유의 전란 때문에 많은 문헌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후에야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의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으로 대개 지주들이었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직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예컨대 서원(書院향약(鄕約향청(鄕廳두레계(족보 등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취락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인 발행의 단행본· 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는 861, 1934년에는 1,090건이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 1933년에는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 중 족보의 발행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10개 년간(1823~1932)의 족보 발행 회수를 각 본관 성씨별로 따져 본다면, 일족 이 가장 번영한 김해김씨는 112, 연평균 12.5회로서 수위를 차지하며, 밀양박씨가 88, 경주김씨가 69, 전주이씨가68, 경주 이씨가 55, 호산신씨가 42, 광산김씨가 38, 안동권씨가 34, 수원백씨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도 필사 또는 등사본(謄寫本) 등의 유포가 적지 않았을 것을 고려할 때, 당시 얼마나 족보 발행이 성행 했던가를 짐작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