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6촌(진한 6촌. 사로 6촌 – 신라 6부)
{성씨 순위}
1째 ; 李씨, 2째 ; 崔氏 3째 ; 孫氏, 4째 ; 鄭氏, 5째 ; 裵氏, 6째 ; 薛氏,
위 여섯 성인을 6촌 촌장. 6부 대인이라 칭하였습니다.
* 6 대인과 박혁거세 시조의 공생관계의 유래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순위.........성씨........조상명........시조 왕위
첫째.........이씨........알평...........은렬왕
둘째.........최씨........소벌도리.....문렬왕
셋째.........손씨........구마...........문의왕
넷째.........정씨.........지백호.......감문왕
다섯째......배씨.........지타..........장렬왕
여섯째......설씨.........호진..........장무왕
# 시조 탄강 {시조의 출생}
전한 무제 원수 6년 갑자년{단기 2217년}에 하늘에서 6대인 (덕이 높은 여섯 분}이 경주 땅에 탄강{임금이나 성인 등이 출생 하는 것}하였다.
◈ 첫째는 ; 알천 양산촌이니 촌장을 알평으로 처음 표암봉에 강림 하였고
◈ 둘째는 ; 돌산 고어촌이니 촌장을 소벌도리로 처음 형산에 강림 하였고
◈ 셋째는 ; 무산 대수촌이니 촌장을 구레마로 처음 이산에 강림 하였다,
◈ 넷째는 ; 취산 진지촌이니 촌장을 지백호로 처음 화산[경주시 동북쪽 20리 지점]에 강림 하였다,
◈ 다섯째는 ; 금산 가리촌 이니 촌장은 지타로 처음 명활산에 강림 하였고
◈ 여섯째는 ; 명활산 고화촌 이니 촌장은 호진으로 처음 금강산에 강림 하였다,
# 입군왕(立君王)
전한 선제 지절 원년 임자{단기2260년} 3월1일에 여섯 분의 촌장 과 더불어 양산 기슭의 나정에 모였다가 숲 사이에 흰 말이 구부려 절하는 모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보니 흰 말은 보이지 않고 박{표주박}같이 생긴 큰 알이 있어 깨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점을 이상이 여긴 6촌장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 아이가 13세가 됨에 모든 것이 우뚝하였다.
그 아이의 태어남이 신기하여 육 대인은 그 아이를 세워 임금을 삼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이 아이를 왕으로 옹립하니 즉 신라시조 혁거세이다.
6촌장이 모두 좌명공신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을 도운 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니 이때가 전한 선제 오봉 원년 갑자{단기 2277년} 여름 4월이다,
# 사성(賜姓) {나라에서 성을 내려주는 것}
유리왕{신라의 제 3대 임금} 9년 임진{단기 2365년} 봄에 부명을 고칠 때에 6대인의 후손에게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
# 성씨를 처음으로 부여받은 기록
{1} 양산촌(부)를 급량부로 하고 이씨
{2} 고허촌(부)를 사량부로 하고 최씨
{3} 대수촌(부)를 점량부로 하고 손씨
{4} 우진촌(부)를 본피부로 하고 정씨
{5} 가리촌(부)를 한지부로 하고 배씨
{6} 명활촌(부)을 습비부로 하고 설씨를 사성(賜姓) 하셨다,
# 증시(贈諡) - 임금이 시호를 내림 및 추봉 - 뒤에 봉함.
법흥왕{신라22대 임금} 3년 병신{단기2849년}에 6부장에게 시호을 추증하였고 태종무열왕{신라의29대 임금} 3년 병진{단기2989년}에 6부장(6부대인)을 왕으로 추봉하였다.
/알평의 자는 천서니 시호는 충헌( ?)이고 은열왕으로 봉하였다.
/소벌도리의 자는 당운이니 시호는 충선이고 문열왕으로 봉하였다.
/구레마의 자는 경운이니 시호는 충렬이고 문의왕으로 봉하였다,
/ 지백호의 자는 인세이니 시호는 문화이고 감문왕으로 봉하였다,
/지타의 자는 즙문이니 시호는 문양이고 장렬왕으로 봉하였다,
/ 호진의 자는 백양이니 시호는 무신이고 장무왕으로 봉하였다,
# 철향{충의와 도덕을 기리는 서원 사당에 배양함}
광복 후 24년 신해{서기1971년}에 경주의 관민이 육촌장의 개국{나라를 세움}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경주시 탑정동 나정리에 촌장각을 세워 묘는 입덕묘 라고 하고 재는{제사} 양산재(楊山齋)라 하고 육촌장을 철향하니 그 위차는
/첫째 알천양산 촌장이고
/둘째는 돌산고어 촌장이고
/셋째는 취산진지 촌장이고
/넷째는 무산대수 촌장이고
/다섯째는 금산가리 촌장이고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 촌장이다,
제사(祭祀)의 이름은 신라대제(新羅大祭)라 하니 음력 8월17일이다,
{참고} 상고하건데 취산 진지촌이 육촌에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셋째로 기록되었고 삼국유사에는 넷째로 기록되었는데 이제 입덕묘의 철향{서원 사당} 위차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버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하니 대개 유림의 중의를 쫓을뿐 아니라 또 삼국사기가 정사인 점을 중의 여긴 것이다,
# 증거 # 삼국사기{신라 본기시조 혁거세 조}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단기4377년 서기전57년}4월 병진날{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함}에 즉위{임금이왕위에 오른 것}하여 와호를 거서간{귀인을 일컫는 뜻이다.}이라 하고 그때 나이13세로 나라의 이름은 서나벌이라 하였다,
일찌기 조선의 유민{망하여 없어진 나라의백성}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 간에 헤여저 여섯 촌락을이루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이고
/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고
/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란 것이니 진한의 육부이었다,
고허촌장 소멸공이 하루는 양산 밑 나정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본 즉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지라 가보니 말은 간데없고 다만 있는 것은 큰 알뿐이었다,
알을 깨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거기서 나왔다,
곧 소멸공이 데려다가 길렀더니 나이10여세가 되매 유달리 솟아나게 일찍 되었다,
육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높이 받들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진인{진나라 사람- 우리나라 진한. 변한. 마한의 진한辰韓}은 박{표주박}을 박씨라 함에 처음 큰 알이 박과 같아 하여 박으로써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인의 말에 왕이란 뜻이다,
# 삼국사기{신라 본조 유리 마사 금조}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양산부를 급량부로 하고 이씨를 주고
/고허부를 사량부로 하고 최씨를 주고
/대수부를 점량부로 하고 손씨를 주고
/진지부를 본피부로 하고 정씨로 주고
/ 가리부를 한지부로 하고 배씨로 주고
/명활부를 습비부로 하고 설씨를 주다,
이때는 유리왕 9년 임진{단기2365년. 서기 32년} 봄이다,
# 삼국유사
진한 땅{참고}진한은 본래 진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들어오니 한에서 땅를 떼여 주었으니 이것을 진한이라 뒤에 신라의 서울이 되었으니 지금의 경주이다,}에 육촌이 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장 알평이니 처음 표암봉에 내려와서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고
/둘째는 돌산고어촌장 소멸도리니 처음 형산에 내려와서 사량부 최씨의 조상이 되고
/셋째는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이니 처음 이산에 내려와서 손씨의 조상이 되고
/넷째는 취산진지촌장 지백호니 처음 화산에 내려와서 정씨의 조상이 되고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장 지타니 처음 명활산에 내려와서 배씨의 조상이 되고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이니 처음 금강산에 내려와서 설씨의 조상 되었다,
# 동국사
조선 백성이 동해 바닷가에 헤어져 육촌으로 나누어 살았으니 이것이 진한이다,
전한 선재 오동 원년 갑자{단기2277년}에 육부의 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되 우리들이 임금이 없으니 덕이 있는 사람으로 임금을 세우자 하고 진지촌장 지백호공 등이 혁거세를 세워 임금을 삼고 진한{경주}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유리왕 9년 임진{단기2365년}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급량부를 이씨로 /사량부를 최씨로 /모량부를 손씨로 /진지부를 정씨로 /가리부를 배씨로 /명활부를 설씨로 주니 이것을 신라 육부대성 이라고 한다.......................
여기 까지가 {육대인}께서 처음으로 성씨을 부여받고 {왕}위를 봉작 받았던 기록입니다,
그리고 {혁거세},와의 동조상부 즉 육대인 과 혁거세와의 두터운 친분관계가 형성 되어 있다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급량부(及梁部), 사량부(沙梁部), 점량부(漸梁部), 본피부(本彼部), 한기부(漢祇部), 습비부(習比部)의 백성에게 각각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을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