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화수회 유래 - 2
3) 경주이씨 화수회 현판사액
(1) 1867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양촌)에 양호영당을 세우고 익제공, 백사공, 구천공, 생곡공, 회와공, 오천공의 영정을 모시고 분향할 것을 9인(유원, 유승, 유응, 교영, 규창, 규정, 규선, 규철, 용우)이 화합하였으니 이때 최초로 화수실을 세운듯하다.
(2) 1868년(고종5) 가을 양촌에 10여칸의 초가에 "경주이씨 화수실"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사액한 것이다.
※ 구천공 : 휘는 세필, 호는 구천, 삼척부사, 공조참의, 동부승지에 제수 불부하고 성리학 과 예학에 몰두함. 子인 태좌(영의정, 문정공, 아곡공)의 추은에 의하여 영의정 추증, 소판공 29세,(*27세손) 상서공 13세(*12세손)로 백사공의 증손이다.
※ 생곡공 : 휘는 인환, 호는 생곡, 대사간,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개성유수, 도승지,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익제공의 14세손,(*30세. 익재공의 13세손) 운와공의 13세손(*30세에 18세이니 12세손), 락안공(*낙안공)의 10세손(*9세손), 벽오공의 손자이며, 생부는 춘천공 경휘이고, 양부는 참판공 경연이시다.
※ 회와공 : 휘는 인엽(*30세), 호는 회와, 대제학으로 소판공 30세손(*29세손), 생곡공과는 사촌. 좌의정 경억의 子
※ 오천공 : 휘는 종성, 호는 오천, 영의정으로 장조(사도세자) 묘정에 배향, 시호는 문충공, 백사공의 6세손(*5세손), 구천공의 손자, 영의정 태좌의 子로서 3대가 영상에 올랐다.
※유원 : 호는 귤산, 고종조 영의정으로 시호가 문충공, 백사공의 10세손(백사 25세. 유원 33세이니 8세손)
※ 유응 : 정언으로 백사공의 10세손.(*8세손)
※ 유승 : 호는 동오, 좌찬성으로 백사공의 10세손(*8세손). 오천공의 현손
※ 규정 : 익제공(*익재공)의 20세손(*36세. 익재공의 19세손) 재사당파
※ 규선 : 익제공(*익재공)의 20세손,(*36세. 익재공의 19세손) 생곡공의 10세손(*생곡공 30세. 규선 36세이니 6세손)
※ 규철 : 익제공의 20세손(*익재공의 19세손), 화곡공의 10세손(*화곡공 29세, 규철 36세이니 9세손). 파서공 집두(형조판서)의 손자
※ 용우 : 익제공의 22세손(*익재공 17세 용우 38세이니 익재공의 21세손), 화곡공의 12세손(*화곡공 29세. 용우 38세이니 화곡공의 9세손), 보재의 양부, 이조참의, 승지를 지냈고, 증 참판이다.
4) 성재공 시영 부통령의 화수회
(1) 1946. 3. 25. 전국에 통문을 돌려 사직공원에서 "표암후손 이씨 화수회" 창립총회 개최 (초대총재 이시영, 초대회장 이규채)
(2) 1953년 6.25사변으로 부산 동래에서 임시총회
(3) 1977년 종묘 락공정에서 "경주이씨 중앙화수회"로 개칭, 회칙제정 공포
(4) 1978년 무오 대동보 발간
(5) 1980년 일주 임용 부회장 성금으로 화수회 무실 임대 개관(종로구 행촌동)
(6) 1981년 화수회 교양지인 표암지 창간호 발간
(7) 1982년 호암 병철 총재가 건물을 희사하여 화수회관 개관(종로구 명륜동)
(8) 1983년 종보인 월간지 창간호 발간
(9) 1990년 유림회관에서 화수회관 건립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재단법인설립
(10) 1998년 삼성그룹과 종친들의 표성으로 현 화수회관 건립 준공
※성재공 : 휘는 시영, 호는 성재, 고종 5년(1885) 초시 입격,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다
일제침략에 대비 신민회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한일합방 후 신흥무관학교 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총본산으로 항일운동, 상해에서 임정 수립하여 초대 법무총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 민주국민당 대통령 후보, 백사공의 11세손(*10세손, 백사 25세 성재 35세)이조판서 유승의 5남이시다.
※호암 : 휘는 병철, 판전공파 후손으로 삼성그룹 창설 회장, 금탑산업훈장 수여, 87년부터 3남 건희 회장이 대를 잇고 있다.
경주(慶州)이씨(李氏) 금석록(金石錄)을 보면 우리 화수회가 발족한 것은 고종 5년 戊辰1868년으로 지금부터 136년 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고종 초기 대원군께서 섭정하고 계실 때 전국에 왕명으로 각 성씨들은 각기 항렬자(行列字)를 정하고 이에 따라 작명하되 장파(長派)의 항렬자를 따라 통일하여 성명만 보더라도 그 관향과 항렬을 단번에 알아보고 서로 돈목(敦睦)하고 위아래 차서(次序)를 혼동(混同)해서 망발(妄發)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
이에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익재(益齋), 국당(菊堂), 상서(尙書), 3파 자손이 장파(長派)인(長派는 平理公派이나 당시 모여서 의논한 파 가운데) 익재공파(益齋公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오촌공파(梧村公派)가 세거(世居)하고 있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연촌(現 龍亭里 陽村部落)에 모여서 화수회를 창립 발족하였으니 바로 고종 5년 무진 1868년 가을이었다.
여기서 진천(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를 따라서 작명키로 의정(議定)하였으며 당시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
蓮村(연촌)에는 10여간 짜리 초가를 세우고 慶州李氏 花樹室(경주이씨 화수실)이라 편액을 걸고 화수회가 모이는 곳으로 삼고 장파 익재공파가 사는 곳에 세웠던 것이다.
이 화수회 집회소인 화수실에 건 편액은 興宣大院君께서 우리 慶州李氏의 돈목함을 가상히 여기시고 더욱 수족(收族)하여 돈목하라고 장려하시며 화수회에서 약조한 것을 영원토록 잘 지켜 나가라는 뜻으로 친히 [慶州李氏 花樹室]이라고 7자를 크게 써서 내려 주신 것을 원본은 싸서 잘 간수해 두고 그 글씨를 본떠 판에 새겨 걸었던 것이다.
경주이씨 화수회(慶州李氏 花樹會)란 명칭은 이때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니 이때를 기원으로 하고 여기서부터 기산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世行表 橫看(세항표 횡간)
第一派 行列字自원表至集 익재공파에서는 8별집 재사당공 원에서부터 行列字를 쓰기 시작했으며 集字까지 표시했음.
第二派自廷馨始至顯 국당공파에서는 8정집 知退堂廷馨부터 시작하여 顯字까지표시했음.
第三派自塢始至容 국당공파靖順公誠中派에서는 塢에서 시작하여 容까지 표시했고
第四派自成茂始至裕 尙書公派에서는 成茂에서 시작하여 裕까지 표시했음.
慶州李氏花樹室 跋
聖上五年命各姓從長派行此敦敍之大政也我李氏益齋菊堂尙書三派子孫合行同字鎭鄕蓮村구草室十餘架以作花樹會之所從長派居也 興宣大院君閤下嘉惠慶州李氏花樹室七字念吾宗之敦睦而비永遵約條之意也其摹寫刻揭也原本粧池藏于家使後孫知我 聖上敦敍之化也戊辰仲秋裕元謹識(金石錄 권24 추록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