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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와 전주이씨 - 2

녹전 이이록 2024. 3. 16. 07:48

경주이씨와 전주이씨 - 2

 

그런데 중국은 그 순서가 바뀌어 몇 해 전 인구조사에서 이씨(李氏)가 제일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중국에는 김씨(金氏)가 매우 드물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의 이씨(李氏)를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의 성씨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씨의 순서는 바뀌니 재래로 김해김씨 · 전주리씨 ·밀양박씨 순서로 알고 있었는데 1985년 인구조사에서 김해김씨 280, 밀양박씨 270, 전주리씨 240만명 순서로 재래의 추측을 뒤엎었다.

 

현재 우리나라 이씨의 본관은 237본인데, 그전의증보문헌비고에서는451본으로,조선씨족통보에서는 546본으로 나타났던 일이 있다.

 

이를 견주어 보면 오늘날 이씨의 본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든 셈이다.

 

237본의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韓國系)와 중국계(中國系)와 기타계(其他系)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가평이씨(加平李氏). 금구이씨(金溝李氏), 덕은이씨(德恩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 진주이씨(晋州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중국계로는 다음과 같은 성씨들이 있다.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정선이씨(旌善李氏). 청해이씨(靑海李氏). 태안이씨(泰安李氏). 태원이씨(太原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기타계로는 안남국(安南國 : 현재의 越南(월남)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나라로 망명,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하여 산 화산이씨(花山李氏)와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

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