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중시조. 분적조, 분파조 등 유명인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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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평공 이철견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의 추원제는 양평공 철견의 위패를 모셨다.
양평공은 다재다능하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등 다섯 임금을 모시며 애국충정을 다한 명신이다.
성종조, 한성부 판윤으로 재직할 때 백성들을 이주시켜 국경을 안정시킨 사민의 공이 있었고 나라의 중대사마다 탁월한 경륜을 발휘하여 신망이 두터웠던 성종조의 충신이다.
좌리공신과 월성군을 봉하고 의금부오위도총부도총관과 형조, 호조의 판서, 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두 번 한성판윤이 되고, 재차 대사헌을 지내 문무를 겸비하고 국사에 밝았다.
연산군 2년에 별세하니, 나라에서는 시호를 양평이라 하고 불천지위를 명하였다.
(3) 세촌공 이문좌
세촌공 문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다.
성종조에 문과에 장원급제, 조정의 촉망을 받아 서장관으로 어서를 받들고 중국에 다녀왔으며, 사헌부 대간의 물망에까지 올랐으나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안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세촌공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맡은 바 직무에 정성을 다했으니 안협 현감으로 재직시 고을에 흉년이 들자 세금을 면제하고 관아의 곡식을 풀어 천재지변에서 백성을 구하였다.
(4) 천휴당 이몽규
천휴당 몽규선생은 충남 보령 땅에서 은거할 때 서실에 천휴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천휴당이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은 말을 배울 무렵에 벌써 책을 읽었고 여나무살에는 대의를 깨우칠 정도로 명석했으니 천휴당 선생의 스승은 제자의 재주에 탄복하여 후일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될 것이라 하였다.
본디 정신이 고상하고 부귀와 영달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집안에는 선생을 흠모하여 찾아드는 명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세 후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5) 창평공 이공린
평안관찰사 윤인의 아들인 창평공 공린은 장인인 박팽년의 죄에 연루되어 삼십년간이나 출사치 못하다가 공의 어머니 남양홍씨가 절부로 장려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환로에 올라 창평현감을 지냈다.
창평공은 팔별집의 일화로 더욱 유명한데 신혼 첫날밤, 꿈에 한 노인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아침상에 쓰려던 자라 여덟 마리를 방생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들이 모두 헌달하여 팔별 집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재사당 원은 사화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 재사당 이원
창평공의 셋째 아들인 제사당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9세 어린나이로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에 올랐다.
연산조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들이 화를 입을 때 재사당 역시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6년 뒤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처남 최명남이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모시니 경기도 양주군 회전면 덕계리에 있는 지금의 묘소이다.
당시 공의 나이 서른 넷, 충절이 지조를 지키다가 아까운 나이에 참화를 당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의 무오, 갑자사화에 이어 중종조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훈구파에게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 이때 성균관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 뜰로 나가 조광조의 무고함을 극간했던 이가 모산공 해이다.
본시 영달에는 욕심이 없어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나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초개처럼 여겼던 것이다.
(6) 용재공 이종준
경북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에 위치한 경광서원, 이곳에는 높은 학덕과 절개로 안동유림의 추앙을 받는 용재공 종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재공은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대의 명유인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교우가 되었다.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던 공이 시와 글씨는 당대 으뜸이라 중국 사람들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가 화근이라 했던가?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유배 가는 도중,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담아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이 시가 나라를 비방하고 임금을 원망한다는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종반정 후 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이 신원되었으나 복관되지 않다가 용재공의 절개를 추앙한 안동 선비들이 조정에 주청하여 숙종조에 마침내 신원되었고 부제학을 증직 받았다.
▲ 백사 이항복
사화와 당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선조조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사상 초유의 국난을 맞아 경주이씨 충절의 전통은 국난극복의 민족혼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임지왜란 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병조판서로서 비상시의 대 국방 책무를 맡았던 백사 이항복 선생, 백사선생은 뛰어난 지모와 불굴의 의지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국운을 구한 조선조 4대 명신 중의 한 분이다.
왜란당시 도승지였던 백사선생은 탁월한 지혜로 숱한 위기를 넘기며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하고 근왕병을 모집하여 전란 평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왜란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고 전란 후에는 영의정으로 질서회복과 민심수습에 전력했던 선생은 광해군조 인목대비 폐모 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서거하였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온 나라가 혼미하던 시대를 살면서 전시에는 충신이요. 전란 후에는 당쟁의 조정에 힘썼던 명신 이었으며, 청백리였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완벽한 선비의 전형이었으니 선생이 빛나는 삶과 지조 있는 죽음을 후학들의 사표로 영원히 추앙 받고 있다.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백사선생의 선영, 이곳에는 평생 벼슬을 멀리했으나 학덕으로 추천되어 좌찬성에 증직되었던 선생의 조부 예신, 춘방보덕 편수관 평안부사를 거쳐 직제학에 추증되었던 백부 봉윤. 그리고 부친 정헌공 몽양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정헌공은 진천수령으로 있을 때 상전을 모략하는 종을 엄벌하여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던 명관이었다.
정헌공의 삼남인 (송복은 병자호란 때 왜군에)??? 굴하지 않고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백사선생의 사남으로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던 기남과 선생의 뒤를 이어 가문의 이름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