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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중시조. 분적조, 분파조 등 유명인물 – 2

녹전 이이록 2023. 6. 27. 07:59

경주이씨 중시조. 분적조, 분파조 등 유명인물 2

 

작성자는 상록수님으로 복사자료 입니다.

 

10. 송암공 이세기

송암공 세기를 주벽으로 모신 단구서원,

송암공은 천장 급제하여 대제학과 검교정승 직을 지냈다.

슬하에 네 아들 또한 잇달아 대과에 급제 문명이 일세에 떨치니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맥금리에 설단 하였다.

송암공의 장남 천은 국당공파, 차남 매는 부정공파, 3남 과는 상서공파, 4남 조는 사인공파를 형성하였다.

 

. 국당공 이천

국당공 천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얻고 왕에게 경서를 시강하였다.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재상급인 문하시랑평장사와 월성부원군의 봉호를 제수 받았다.

네 아들 문정공 경중, 판서공 배중, 제정공 달충, 정순공 성중의 후손이 국당공파의 세계를 계승하였다.

 

(1) 문정공 이경중 

 장남 문정공은 국방과 치안을 담다하는 삼중대광 중서문하 판병부사를 역임하고 월성군을 봉분 받았으며 국당공의 증손 정보는 태종조에 선비들이 정승보다 높이 쳤다는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2) 제정공 이달충

제정공의 본래 이름은 달중 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달충으로 고쳤다 한다.

도순문사 퇴임시 전별주석에서 이성계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후손을 부탁하니, 태조가 자손들 이름에 설립자를 넣도록 했다고 한다.

 

(3) 정순공 이성중

고려 말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던 정순공 성중은 고려의 명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조선개국에 분골쇄신하여 개국원종공신으로 좌정승에 올랐다.

 

(4) 월파공 이제

 재정공의 증손인 월파공 재는 단종조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시작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했다.

 

(5) 부정공 23 

경북 금릉군 계룡면 양촌리 부정공 23공 사단.

부정공파는 매를 파조로 전법판서 오성군 경지와 수찬 경원의 후손들이 세계를 형성하였다

 

(6) 부정공 이매

부정공은 형제분인 국당공, 상서공, 사인공, 4촌인 익재공과 더불어 당대 으뜸가는 문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묘소와 사적이 모두 실전되어 그 혁혁했던 발자취가 전해지지 않으니 애통한 일이다.

 

. 상서공 이과

상서공 과 역시 고려조 상서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일언일사도 전하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고려 말 세상이 날로 혼탁해지는 것을 보고 산림에 물러 나와서 세상일에 간여치 않는 까닭인가 한다.

 

(1) 지인주사공 이원보

 묘소 또한 실전되어 평택군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 아래에 아들인 지인주사 (원봉 원보)(*양태분 양대분)의 사단을 배설하였다.

상서공파는 조선조에 정승이 여섯 분, 행직 판서가 십여 분이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국충절에 앞장섰던 공신도 여러분이 있어 인재의 가문으로 일컬어진다.

 

. 사인공 조

 사인공 조는 일찍이 학덕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강직 고절한 성품으로 인하여 화를 입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곽산으로 배소를 옮겼다.

 

이성계가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개국하자, 두문동에 우거하며 조선왕실의 입조 권유를 끝내 뿌리쳤다.

두문동 청절사에 배향된 절신 이십인 중 한분으로 *(8세손 촌림 9세손 춘림), 춘정 형제분 또한 병자호란 중에 순절한 하늘이 내린 충절의 가문이다.

 

11. 판전공 이강 사단

 

判典公派(판전공파)에 대하여

공의 휘는 강으로 (*시조로부터 50세손이 되며 삭제. 시조 계대가 실전되어 시조세수로는 헤아려 읽지 않는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15세손 15. 15^ . 14세손)으로서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객시사(判典客侍事)의 벼슬을 하셨으나 난중(亂中)의 화를 피하여 산중촌락에서 독서만 즐기셨다.

공의 백형은 휘 핵으로 ()가 만리요, 호는 悅軒(열헌)으로 문하평리의 벼슬을 하셨고 상서좌복야로 증직 받으셨다.

열헌공이 슬하에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첫째가 성암공(誠庵公) 휘 인정, 둘째가 동암공(東菴公)휘 진, 셋째가 송암공(松巖公) 휘 세기이며, 공의 중형인 휘 ()은 그 아들이 직간(直幹)으로 장수이씨로 분적 되었다.

 

판전공의 아드님은 휘 신유(臣裕)로 봉익대부예의판서를 지내셨다.

판전공은 14개 대파 중에서 (아홉 번째 대종으로 삭제) 첫손자가 낭장 휘 원무(元茂)이시고, 아들 첨정공 휘 운경(雲敬)에서 5개 중종으로 분파하고, 판서공의 둘째 아들은 병정공 휘 문저(文著)로 그 아래로 예빈시 봉사공 휘 태()를 두셨다.

5개 중종은 첫째가 비순위중랑장 휘 (), 둘째는 휘 ()인데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해온다.

셋째는 감찰공 휘 자이고, 넷째는 예의판서 휘 오, 다섯째는 훈련원판관 휘 사이다.

 

공은 고려 문관위계의 정순대부라는 품계로 정3품 당상관이시니 고려 25대 충렬왕 34(1308)에 여러 관계를 고치면서 새로 제정된 사실을 고려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충렬왕 때 품계를 보면 당상관으로는

1: 삼중대광(三重大匡), 1: 중대광(重大匡),

2: 광정대부(匡靖大夫), 2: 통헌대부(通憲大夫)

3: 정순대부(正順大夫), 당하관으로는 정3: 봉순대부(奉順大夫), 3: 중정대부(重正大夫)/중현대부(重顯大夫), 4: 봉상대부(奉常大夫), 4: 봉선대부(奉善大夫)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객시라는 관사가 의부(그 뒤 고려 26대 충선왕 21310년에 예의사로 개칭)에 배속되어 외국의 사신 또는 빈객을 영접하고 왕실과 재상들의 주요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으뜸은 판사(判事)이다.

공은 어느 때 계셨는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 당시 밀직 승지인 동암공 휘 진이 공의 큰집 둘째 조카이며 충렬왕 13(1287)에 공의 연세가 44세로 추정하여 볼 때 익재공이 태어나셨으니 공이 익재공의 종조부가 되시고 동암공의 막내 삼촌이 되시매 그때 공의 연세가 동암공과 몇 세 차이가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대적으로 공께서 판전객시사라는 벼슬에 계실 때 충렬왕 24(1298)경 부터이며 공의 연세가 68세가 되시든 1308년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공께서도 낙향하신 걸로 추축된다.

 

공의 관직인 정순대부 판전객시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시기는 고려 충렬왕 341308년이며, 품위 3품 당상관이고, 관사 전객시로 지금의 의전실이 되며, 직위 판사(判事/3)로 지금의 의전실장이셨다.

공의 묘소는 실전(失傳)으로 후손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다가 서기 1988년 중시조 동역내인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 양천부락 후원에 설단하고 단비를 세우니 이제 공의 크나큰 자취를 남기시게 되었다.

매년 음력 9월 하정일(下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울산 양천의 감찰공(휘 자)*7세손 6새손인 휘 석종은 초휘가 석숭, 수문장으로 창궐하여 선무3등공신으로 울산읍지에 기록되었다.

 

울산 양천의 소판공 사단은 감찰공의 후손들이 설단, 수호하고 있다.

判典公派(판전공파)의 파조인 강(+)은 득견의 3남이며 열헌공의 막내아우가 된다.

벼슬은 고려조 정순대부 판전객시사를 역임하였고, 아들 신유는 봉의대부 예의판서에 올랐다.

원무, 운경을 거쳐 공의 *고손 현손 , , , , 사 등 다섯 형제의 후대가 계대를 번창하게 이어지고 있다.

휘 운경의 넷째 오의 아들 휘 눌이 사정공파 파조이며, 셋째아들 휘 자가 감찰공파 파조이며, 첫째 아들 수의 증손자 휘 을규가 호계공파의 파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