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중시조. 분적조, 분파조 등 유명인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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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시조(소판공 이거명)
울산시 청량면 양호단소는 중시조 소판공 거명의 사단을 모신 곳이다.
소판공은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 이제현의 묘지문에 그 선대가 신라 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조이후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가 되었다.
이로써 경주이씨는 소판공으로 중시조로 하고 문중사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 때 소판의 벼슬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판공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으로 번성하여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백팔십 두 분, 재상 여덟 분, 공신 열두 분, 청백리 열 분으로 이 땅에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2. 경주이씨 분적
옛 말에 이씨는 모두 경주이씨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경주 이씨는 이씨 성 가운데 사성의 으뜸 종문으로서 진주, 원주, 재령, 아산, (평창 ⇒ 삭제), 우계, 차성, 합천, 장수, (진위, 덕은, 울산, 영천 ⇒ 삭제) 등의 이씨는 모두 경주이씨의 분적 종파이다. - 1987년(정묘년) 간행 정묘보. 경주이씨 대종보 내용 참조.
3. 경주이씨 본종 분파
(*소판공 ⇒ 중시조) 10세, 춘정 부사. 춘림 문하시랑 형제분을 시작으로 15세 이후부터 주요계파가 형성되었는데 중시조 15세 ~ 21세에서 14개 대파로 분파하였다.
◈ 본종 8대파
평리공파- 16세 이인정,
이암공파- 17세 이관.
익재공파- 17세 이제현,
호군공파– 17세 이지정.
국당공파- 17세 이천,
부정공파- 17세 이매,
상서공파- 17세 이과,
사인공파- 17세 이조,
◈ 지파 6대파
판전공파- 15세 이강,
월성군파- 21세 이지수,
직장공파- 19세 이양오,
석탄공파- 19세 이존오,
진사공파- 19세 이존중.
교감공파- [19세 이존사 이다.
4. 열현공 이핵
고려 말 문하평리를 지낸 (열현공 ⇒ 열헌공) 핵(翮)은 부인 김씨 와의 사이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김씨가 친히 글과 사기를 가르쳐 삼형제가 모두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열현공(이핵)의 세 아들 인정, 진, 세기로부터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각각 평리공파, 이암공파. 익재공파, 호군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를 형성하여 (후손들이 중흥조로) 모셨다.
5. 성암공 이인정
평리공파 파조인 성암공 인정은 문하평리로 있을 때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부당한 관리임명에 반대하여 임용서류에 서명을 거부 정직을 당한 일이 있었다.
성암공의 처자인 우헌납공 규 역시 왕이 승려에게 관직을 내리자 유배를 감수하면서까지 서명날인을 거부하여 나라의 법을 천하에 밝혔다.
6. 진서공 ⇒ 전서공 3세 이원선, 이진, 이인생 ⇒ 이지생
우헌납공의 정지 ⇒ 장자인 진서공 ⇒ 전서공 원선은 전서공파 과 ⇒ 삭제 검교국기감공 의반은 검교공파로 분파하였으니 형제분의 후손이 지금의 평서공파 ⇒ 평리공파를 형성하고 있다.
병판공 이석 ⇒ 삭제 검교국기감공의 손자인 병판공 이석은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날로 어지러워지는 정치상황에 실망하여 행적을 감추고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7. 송탄공 이원
송탄공 원은 (중시조 24세로) 성암공의 8대손이다.
기묘사화로 뜻있는 선비들이 화를 입자, 전라도 고부로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으니 파조이하 평리공파 후손들의 절의가 대개 이와 같았다.
8. 동암공 이진
중시조 15세 열헌공(핵)의 차자인 동암공 진은 아우인 세기와 더불어 왕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에 천장급제하여 대사성, 정당문학을 역임하고 [검교정승, 임해군하다. 시호는 문정으로 시를 잘 짓고] (문장가로 ⇒ 삭제) 명망이 높았다.
9. 익재공 이제현
(그 슬하에서 ⇒ 삭제) 동암공 진의 차자로 (고려 최초의 학자가 탄생하니 ⇒ 삭제) 익재 이제현 선생이 [태어났다.]
익재공[을 익재공파의 파시조로 하여] 세 아들 서종, 달존, 창로의 후손들이 익재공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가. 판윤공 이지대
시랑공(侍朗公) 서종(瑞種)의 증손인 판윤공 지대는 (단종 복위를 꾀하는 사육신의 거사소식에 호응하여, ⇒ 삭제)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한성판윤의 벼슬을 버리고 ⇒ 삭제) [도성을 떠나] 벽촌에 우거하였다.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거처에 손수 심었다는 수령 오백 살의 은행나무는 세월을 뛰어넘는 충절의 의미를 전하는 듯하다.
나. 운와공 이달존
운와공 달존은 열여덟에 등과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나 왕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도중 병을 얻어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순직하였다.
다. 청호공 이회
운와공의 증손 청호공 회는 이조참의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겸 출척사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임지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라. 밀직공 이창로
익재공의 3남으로 개성윤에 올랐던 밀직공 이창로.
밀직공은 우리국토를 침략병합하려는 원나라와 친원파 세력의 책동을 예견하고 이를 적극 방어 견제하여 나라와 왕실이 보존에 신명을 다하였다.
당대의 석학이자 충신이었던 익재공의 음덕 때문이었을까?
대대로 학문과 절개가 빼어난 자손들이 푸르게 일어나니 익재공파는 문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창한 대종문으로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