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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녹전 이이록 2023. 4. 13. 08:37

제사

 

제사에 대한 읽을거리로 좋은 글이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효를 중심적인 덕목으로 보는 유학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춘추좌씨전"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사와 전쟁이었다."라고 한 말에서 나타나듯이, 제사는 국가의 중대사로서 그 조상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宗廟)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제사하는 사직(社稷)과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개념으로까지 쓰였던 것이다.

 

종묘가 집단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가묘는 바로 한 가족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계승을 효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는 유학에서, 가묘는 단순히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 가족생명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가족생명 자체를 상징하는 신성소(神聖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묘는 제사장소 이외에 가족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모임의 장소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혼인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사실을 보고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진 가묘는 집단생명을 상징하는 종묘의 기능과 대비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은 그 구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처하는 곳의 동쪽 정결한 곳에 사당을 짓고 내부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감실을 두며, 중앙에 향로와 향합을 둔다.

 

다만 종묘에는 시조를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중앙에 두는 데 비해, 가묘에는 대체로 부모에서 고조부까지 4대만을 제사하며, 대가 바뀌면 차례로 그 조상의 위패를 철거한다.

 

가묘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주자(朱子)가례 家禮를 지으면서 반드시 가묘를 두고 조상을 제사하도록 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가묘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주자학의 유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정몽주는 주자가례와 함께 이 가묘 제도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사대부는 물론 점차 일반인에게까지 확대 시행되었다.

 

다만 초기에 일반인은 물론 사대부의 경우도 반드시 고조부까지 4대를 봉사한 것은 아니었고, 부모나 조부모만을 봉사하던 것이 점차 확대되어 고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점은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의 부록 '사당도'(祠堂圖)에 증조부까지 3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초기에는 군주에 한정되었던 4대 봉사가 일반에까지 확대된 것은, 가족사이의 애정은 상하의 구별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애정은 적어도 4대까지는 지속되었다가 사라진다는 친진(親盡)의 논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봉제사(奉祭祀)는 사삿집에서 제사를 지내 조상을 받드는 일로서, 봉사(奉祀)라고도 부른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전반까지는 봉제사를 후손이 행해야 할 의무로서 여겼고, 봉제사에서 아들과 딸을 구별 또는 차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에게 봉제사할 때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지낼 수 있었으며, 사위가 지낼 수도 있었다.

 

또한 사위의 사위(딸의 사위)나 외손이 지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외손자가 일찍 죽자 혈연관계가 없는 사위의 첩의 아들이 제주가 된 때도 있었다.

 

이렇게 아들뿐만 아니라 딸과 사위까지 제사에서 일정 역할을 맡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조선 중기까지는 윤회봉사(輪廻奉祀)라고 하여 차례로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고, 분할봉사(分割奉祀)라고 하여 제사의 일부를 나누어 맡기도 하였다.

 

또한 외손봉사(外孫奉祀)도 있는데, 이는 아들이 전혀 없어서 외손이 제사를 맡는 일을 가리킨다.

 

예컨대 율곡 이이의 외가는 3대째 아들이 없어서 그 외손들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았다.

 

봉제사를 전담하는 사람은 상속에서 우선권이 주어졌다.

 

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에게 권리·권한을 준다는 뜻이었다.

 

이것에는 아들과 딸(또는 사위)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고, 친손과 외손의 구별이나 차별도 없었다.

 

17세기 후반부터 봉제사에서 남녀의 차별이 생겨났다.

 

이는 조선사회에서 남자 집안 중심의 제사를 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제사에서 소외된 사외나 외손은 차츰 제사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며, 그에 따라 제사는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당시 맏며느리의 권한과 권위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였다.

 

맏며느리는 모든 문제를 시어머니에게 의논하고, 다른 며느리들은 맏며느리에게 물어야 한다. 예기

 

맏며느리에게 다른 며느리들은 대적할 수 없으니맏며느리와 나란히 걸어서도 안 되고, 윗사람 명령을 똑같이 받아서도 안 되며 맏며느리와 나란히 앉아서도 안 된다.”

 

위의 내용은 맏며느리의 절대적 권위를 알게 해주는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내용이 중시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매우 중시된다.

 

이러한 권위와 권한은 맏며느리가 맡은 의무, 곧 봉제사가 그만큼 막중했음을 뜻한다.

 

장남과 맏며느리는 차츰 제사를 독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속에서 상속 지분을 독점하게 된다.

 

이는 제사의 주체가 장남과 맏며느리였다는 뜻이다.

 

한편 그때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변화는 당시로는 선진적 제도인 부계사회로의 이동이었으며, 또한 조선 사회에서 힘이 분산되기보다 한곳에 모이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찍 부계적으로 바뀐 집안이 더 잘 고 더 번성하였다.

 

정부가 1969년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을 제정하여 허례허식을 피하고 검소한 제례를 갖추도록 권장해 온 이후, 기제의 대상이 4대 봉사에서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국한되는 경향이 많아졌다.

 

1999831'가정의례준칙'은 폐지하고 동일자로 '건전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하였다.

 

오늘날 봉제사의 주체는 남자 후손이지만 실제 제사 때 일하는 사람은 남자 후손의 아내, 곧 며느리이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아무런 권한이나 권위도 없이 그저 의무만 있고 가부장제도 역시 이전에 비해 심히 약해졌다.

 

최근 민법에서 제사를 전담하는 후손은 상속에서 제사를 위해 분할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실제 제사 때 일하는 며느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핵가족화, 결혼관의 변화, 종교적 소신 등으로 제사 의식이 퇴색하는 추세이다.

 

개신교인이나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명절 때마다 늘어나는 인천공항 이용객 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해가 지날수록 조상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윤행봉사(輪行奉祀)는 남녀, 재가의 자손 등 모든 자손들이 차별없이 조상의 제사를 돌아가며 지내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을 윤행(輪行)이라 하였으며, 자손들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았고, 재산상속(균분상속)이나 제사 모시는 일에 아들 딸 구분이 없었기에 가능하였다.

 

조선중기에 이르러 남녀차별로 인한 재산상속 차별, 종손(양자를 들여서라도)의 부각으로 이 풍습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