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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백과사전의 경주이씨 ‘이반계(李攀桂)’ 기록 오류사항

녹전 이이록 2023. 2. 9. 08:20

위키 백과사전의 경주이씨 이반계(李攀桂)’ 기록 오류사항

 

위키 백과사전에 이반계의 행적을 아래와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누가 올린 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곳에 잘못된 내용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원문에 잘못된 내용은 * 표시를 하고 아래에 [.........]로 나타내고 아래에 수정. 소견)을 올립니다.

 

위키 백과사전에 들어가서 아래내용을 수정하여야 합니다.

 

이반계(李攀桂, ? - 1392)

 

이알평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켰다.

 

()는 송헌(松軒)이며 작위는 경원군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상서(조선시대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조선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을 추증(사후 작위나 벼슬을 내리는 일)하였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이반계는 신라 개국좌명공신 표암 이알평과 신라 말에 소판을 지낸 이거명의 후손으로, *이알평의 58대 손이고, *이거명의 23대 손이며, 고려 중기에 병부 상서(이씨 조선으로는 병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이신우(李申佑)11대손이다.

 

*월성부원군에 봉작된 이지수(李之秀)의 종손으로, 그의 형 지연(之衍)의 셋째 아들 좌복야(左僕射) 자성(子誠)3둘째 아들로서, 을계의 형이고 득계의 동생이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는 친구사이이며, 예부상서 시절에는 이방원을 제자로 가르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虎衛嶺中郞將)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양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과 함께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내려가 사전리에 들어갔다.

 

이후 은거하며 고려의 운이 다하고 이씨의 세상이 됨에 차라리 굶어죽을지라도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후 단식 7일 만에 죽으니 후에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추봉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이반계를 신()원주이씨의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의 맏아들은 이이(李耳) 자는 안지(安之), 호는 송우(松愚), 시호는 문열(文烈),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정주학에 정통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이 대제학의 벼슬을 내렸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교지(敎旨)를 받지 않았다.

 

당시 34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충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이견(李肩) 자는 우오(友吾), 호는 운촌(雲村)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 조선 초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여 정산현감으로 강송되었으며, 임기만 마치고 병을 핑계로 은거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는 영사철비를 세웠고,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는 그의 호를 따서 부르고 있다

 

셋째 아들 이요(李腰. 또는 이오)는 고려 말 승지를 지냈으며, 조선조 초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파주목사로 강송되었다.

 

넷째 아들은 이족(李足) 조선조 초 선무랑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여 산음현감으로 강송되었다.

 

[이반계는 신라 개국좌명공신 표암 이알평과 신라 말에 소판을 지낸 이거명의 후손으로*이알평의 58대 손이고, *이거명의 23대 손이며, 고려 중기에 병부 상서(이조로는 병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이신우(李申佑)11대손이다.]

 

소견)

 

[*이알평의 58대 손이고, 이거명의 23대 손이며.....]

 

- 이알평은 경주이씨 시조입니다.

 

중간에 계대가 실전되어 정확한 시조세수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32년 이후 분적종 합천이씨 세보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 되었다는 ‘35대로 된 실전 세계35대 상계 계대를 활용하여 중시조 23(=23)인 월성군(휘 지수) 세수에 시조상계계대 35(=35)를 더하여 시조 58대 손으로 읽었지만 이는 바른 시조세수가 아닙니다.

 

‘58대 손58대 후손은 삭제하고 원대손(遠代孫)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래와 같이 수정하여야 합니다.

 

[이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고, 이거명의 23대 손이며.....]

 

[*이거명의 23대 손이며...]

 

-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은 중조(중시조) 1세이고 경원군(휘 반계)은 중조 23세이기 때문에 이를 표기하는 바른 방법은 이거명 23대 손(=23세 손)’ . ‘이거명 23대 후손(=23세 후손)’ . ‘이거명의 22대손(=22세손)’으로 읽거나 나타내어야 바릅니다.

 

[병부 상서(이조로는 병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이신우(李申佑)11대손이다.]

 

- 현 대종보 기록에는 중조 12세 휘 신우의 관직이 병부시랑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윗글에서는 병부상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조로는 병조판서에 해당) - 이는 불필요한 말로 삭제해도 좋습니다.

 

시랑공(휘 신우)은 중시조 12세이고 경원군(휘 반계)은 중시조 23(=23)입니다.

 

몇 대손(=세손)’으로는 월성군은 시랑공의 11대손(=11세손)이 맞습니다.

 

즉 월성군(휘 지수)시랑공(휘 신우) 12(=12)’ . ‘시랑공의 12세 손’ . ‘시랑공의 12세 후손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바릅니다.

 

[*월성부원군에 봉작된 이지수(李之秀)의 종손으로, *그의 형 지연(之衍)*셋째 아들 좌복야(左僕射) 자성(子誠)3둘째 아들로서, 을계의 형이고 득계의 동생이다.]

 

[월성부원군에 봉작된...]

 

-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는 관직이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이 아니고 광록월성군(光錄月城君)으로 별칭이 월성군(月城君)이고 대파명이 월성군파(月城君派)입니다.

 

[그의 형 지연(之衍)의 셋째 아들 좌복야(左僕射) 자성(子誠)3둘째 아들로서...]

 

- 지연(之衍)은 지수(之秀)의 형이 아니고 동생입니다.

그러니 그의 형 지연(之衍)..’가 아니고 그의 동생 지연(之衍)...’라고 표기하여야 합니다.

 

[지연(之衍)의 셋째 아들 좌복야(左僕射) 자성(子誠)3둘째 아들로서...]

 

- 대종보 월성군파 지수(之秀)의 행적 옆에 동생인 지연(之衍)의 행적 아래를 보면 셋째아들은 외자로 휘는 성()이고 관직은 좌찬성(左贊成)입니다.

 

위 전 문장은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월성부원군에 봉작된 이지수(李之秀)의 종손으로, *그의 형 지연(之衍)*셋째 아들 좌복야(左僕射) 자성(子誠)3둘째 아들로서, 을계의 형이고 득계의 동생이다.]

 

위키 백과사전 이반계의 가족관계에서

할아버지 : 이지연(李之衍)

*아버지 : 이자성(李子誠)

 

[아버지 : 이자성(李子誠) ]

 

수정)

경원군(慶原君)의 아버지 휘()를 자성(子誠)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족보에 子 誠(아들 성)’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 이를 연달아 읽어 子誠(자성) 이라고 나타낸 것 같습니다

경원군의 아버지 휘()는 외자로 ()입니다.

 

아래와 같이 나타내어야 합니다.

 

[아버지 : 이성(李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