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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5

녹전 이이록 2022. 11. 11. 07:40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5

 

네이버 블로그 경주이씨 판전공파 낙서장에 게재된 주 종친님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 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 ‘귤산문고(橘山文稿)‘ 등 저술을 남겼다.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지목되는 이벽(李檗)이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상면(江上面) 앵자봉(鶯子峰)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ㆍ정약용(丁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10여 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서교(西敎)(천주교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 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 (현 명동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당시 사학(邪學)으로 배척되던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이들은 사회적으로 큰 제재를 받게 됐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 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근세의 경주 이씨(慶州李氏) 인물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상설(李相卨)과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있다.

 

* 이상설(李相卨)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자결(自決)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ㆍ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시영(李始榮)은 백사(白沙)*11세손이며 10세손이며 이종성(李宗城)5대손으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國務委員兼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 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알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근년 작고한 애산(愛山) 이인(李仁)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제(日帝)하 변호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한글학회)사건 때는 회원으로 그 자신이 붙들려가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헌국회의원, 대법원장 직무대리, 검찰총장, 법무부장환, 반민특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다.

60년 참의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애산(愛山)은 몇 해 전 돌아가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다.

 

애산(愛山)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이 근년까지 <유일한 생존자>로 독립운동의 표상이 되어오다 1981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