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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4

녹전 이이록 2022. 11. 10. 07:46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4

 

네이버 블로그 경주이씨 판전공파 낙서장에 게재된 주 종친님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이사균(李思鈞)은 중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재직하던 중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 반정(中宗反正)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몽량(李夢亮)은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 3(衛社功臣三等)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ㆍ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557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559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 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1562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후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전력한 그는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선조 1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158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평난공신 3(平難功臣三等)이 되었다.

도승지(都承旨)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왕()을 호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선조 31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우의정(右議政)으로 전임,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다.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2년 뒤 호성공신1(扈聖功臣一等)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죽은 그 해에 바로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영조 때의 좌의정(左議政) 이태좌(李台佐), 소론(少論)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

(李敬一) 등이 모두 백사(白沙)의 후손이다.

 

이광좌(李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 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이광좌(李光佐)8촌 형인 이태좌(李台佐) 또한 소론(少論)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집안 성시(盛時)를 누렸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 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群山)을 삭평턴들 동정호(洞定湖)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 수가 <뜻을 두고도 못 이룬> 한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국당공(菊堂公) 이천은 아들이 4형제 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이었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원종 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7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廷俌)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이정형(李廷馨)(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장헌세자莊獻世子)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