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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3

녹전 이이록 2022. 11. 9. 07:46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3

 

네이버 블로그 경주이씨 판전공파 낙서장에 게재된 O주 종친님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익재공)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익재공의 스승인 백이정(주자학 도입)의 사위가 됐다

충숙왕 때 18세로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다가 장림 역에서 28세로 요절하였다.

, 이에 앞서 군이 태부인(太夫人)의 상을 당했을 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종족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 뒤에 학업에 종사하여 글을 잘하고 일에 종사하여 재간을 보이자, 그가 가업을 제대로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수명을 더 빌려 주지 않고 이렇게 했단 말인가. , 슬픈 일이다.

 

국당(菊堂) 이천(李蒨)은 충렬왕 25년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밀직사사(密直司事)ㆍ삼중대광 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고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고려조 인물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칭ㆍ이치연(李侈連). 삭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총섬(李寵暹)의 귀함으로 아버지 이치련과 할아버지 이칭이 증직을 받았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증 상서좌복야(贈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핵(李翮)ㆍ이강(李康+-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ㆍ이인정(李仁挺- 문하평리(門下評理)ㆍ이보림(李寶林- 정당 문학政堂文學)ㆍ이존오(李存吾)- 우정언(右正言)ㆍ이달충(李達衷- 정당 문학(政堂文學) 등이 두드러져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는 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한(史翰)에 발탁,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변호로 극형(極刑)을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뒤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었다.

 

이달충(李達衷)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좨주(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ㆍ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했다.

1359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에게 주색(酒色)을 삼가라고 공석(公席)에서 직언(直言)하다가 파면, 1371년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95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조선 초기에 현직에 오른 이래(李來)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로 죽은 후 이어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록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우왕 9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 간관(諫官)에 등용,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파인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주살(誅殺)을 건의했으며,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 곧 풀려나 공주(公州)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정종 1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 2차 왕자(王子)의 난()을 평정,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발탁되고,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2(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1408년 지의정부사겸판경승부사(知議政府事兼判敬承府事))에 이르렀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조선조에서 이씨(李氏)들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유명한 <8별집>은 이익재(李益齋)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 되는 6대손 이공린(李公麟)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장가든 첫날 방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李公麟)은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ㆍ구()ㆍ원(黿)ㆍ타()ㆍ별()ㆍ벽()ㆍ경()ㆍ곤()이라고 거북 구() 아니면 고기 어(), 힘쓸 면(). 맹꽁이 맹(). 힘쓸 민()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 죽음으로써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삭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온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장인인 박팽년(朴彭年)이 죽은 후 그 죄에 연좌되어 30여년을 금고 당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을 받음으로써 그 자식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공린은 성종 13년 무과를 거쳐 현령(縣令)이 되었으나 셋째아들 원(黿)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죽자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중종 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고 청주(淸州)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이구(李龜)는 성종 23년 문과에 급제,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동생 원(黿)의 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이원(黿)은 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연산군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봉상사(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주자고 건의(建議)한 일로 곽산(郭山)에 장류(杖流), 4년 후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