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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1

녹전 이이록 2022. 11. 8. 08:28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1

 

네이버 블로그 경주이씨 판전공파에 게재된 O주 종친님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氏族(씨족)의 연원 

 

시조는 이알평(李謁平).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상계(上系)편에 보면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餐)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유리왕 9년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법흥왕 23*문선공(文宣公) 충헌공(忠憲公)으로 시호(諡號)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 文宣公(문선공)은 공자의 시호로 일반인들은 이를 피휘(避諱)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의 시호를 함부로 취할 수 없는데 우리 시조께 文宣(문선) 시호를 내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이를 살펴보니 대부분 시조님의 시호를 文宣公(문선공)으로 하여 올라있다.

 

그런데 다음과 네이버 카페 3~4 군데에서 충헌공(忠憲公)으로 시호를 표기한 곳이 있어 이것이 바른 표기로 보고 충헌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를 실전(失傳)하였으나 삭제)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말경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본관지 연혁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이 지역을 경주(慶州)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ㆍ부()ㆍ군()ㆍ현()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조에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김()ㆍ노()ㆍ이()ㆍ박()ㆍ배()ㆍ설()ㆍ손()ㆍ온()ㆍ윤()ㆍ 전()ㆍ정()ㆍ최()ㆍ풍()씨 등이 있었다.

 

*경주이씨를 월성이씨라고도 하는 이유는 신라 시대 경주를 궁성이 있던 곳을 반월성이라 하고 금성. 월성. 문천. 계림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고풍스러운 이름을 따서 월성이씨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 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 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35대로 된 실전 세계는 사실적이 아닌 계대임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본관(本貫) 분관(分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시조 분적시조로 하는 협천 이씨(陜川李氏) 합천 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시조 분적시조로 하는 차성 이씨(車城李氏)*갈라졌다. 분적 되었다.

*누락- 이구(李球)을 분관시조(분적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李氏).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 이씨(平昌 李氏),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 이씨(加平 李氏),] 삭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 李氏)5세손 이주좌(李周佐)를 분관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李氏),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6세손 이우칭을 분관 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재령 이씨(載寧李氏),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 李氏) 삭제(시조 후손으로 옮김) 17세손 *이영행(李永倖) 이영재(李永榟)를 분관 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진주 이씨(晉州 李氏),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22세손 이반계(李攀桂)를 분적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갈려 나갔다.

 

누락

중시조 15세 편()의 아들 직간(直幹- 林幹)을 분적시조로 하는 장수 이씨(長水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의 15~21의 조상을 파시조(派始祖)로 하여 14개 대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 이규의 후손이 16세인 이인정(이인정)을 파조(파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17세인 이관(李琯)을 파조(파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李蒨)의 후손이 이천(李蒨)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이매(李邁)를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이과(李薖)을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후손이 이조(李蓨)를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15세조인 15(15세 조상) *이강(李康+)의 후손이 이강(李康+)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21세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조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19세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이존중(李存中)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 중소파(中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서공파(尙書公派)<오신(五臣)>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팔별(八鼈)>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계대에서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을 들 수 있다.

 

조선조에 상서공후 <백사(白沙)>에서만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후 *<8별집>에서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국당공후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에서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