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 1
네이버 블로그 ‘경주이씨 판전공파’에 게재된 O주 종친님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 뒤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 氏族(씨족)의 연원
시조는 이알평(李謁平).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상계(上系)편에 보면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餐)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유리왕 9년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법흥왕 23년 *문선공(文宣公) ⇒ 충헌공(忠憲公)으로 시호(諡號)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 文宣公(문선공)은 공자의 시호로 일반인들은 이를 피휘(避諱)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의 시호를 함부로 취할 수 없는데 우리 시조께 文宣(문선) 시호를 내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이를 살펴보니 대부분 시조님의 시호를 文宣公(문선공)으로 하여 올라있다.
그런데 다음과 네이버 카페 3~4 군데에서 충헌공(忠憲公)으로 시호를 표기한 곳이 있어 이것이 바른 표기로 보고 ‘충헌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를 실전(失傳)하였으나 ⇒ 삭제)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말경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 본관지 연혁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이 지역을 경주(慶州)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조에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김(金)ㆍ노(盧)ㆍ이(李)ㆍ박(朴)ㆍ배(裵)ㆍ설(薛)ㆍ손(孫)ㆍ온(溫)ㆍ윤(尹)ㆍ 전(全)ㆍ정(鄭)ㆍ최(崔)ㆍ풍(馮)씨 등이 있었다.
*경주이씨를 월성이씨라고도 하는 이유는 신라 시대 경주를 궁성이 있던 곳을 반월성이라 하고 금성. 월성. 문천. 계림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고풍스러운 이름을 따서 월성이씨라고 하는 것이다.
◈ 씨족史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 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 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35대로 된 실전 세계’는 사실적이 아닌 계대임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본관(本貫) ⇒ 분관(分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 ⇒ 분적시조로 하는 협천 이씨(陜川李氏) ⇒ 합천 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 ⇒ 분적시조로 하는 차성 이씨(車城李氏)로 *갈라졌다. ⇒ 분적 되었다.
*누락- 이구(李球)을 분관시조(분적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李氏).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 이씨(平昌 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 이씨(加平 李氏)로,] ⇒ 삭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 李氏)로 ⇒ 5세손 이주좌(李周佐)를 분관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 6세손 이우칭을 분관 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 李氏) ⇒ 삭제(시조 후손으로 옮김) 17세손 *이영행(李永倖) ⇒ 이영재(李永榟)를 분관 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진주 이씨(晉州 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 22세손 이반계(李攀桂)를 분적시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갈려 나갔다.
◈ 누락
중시조 15세 편(翩)의 아들 직간(直幹- 林幹)을 분적시조로 하는 장수 이씨(長水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의 ⇒ 15~21세의 조상을 파시조(派始祖)로 하여 14개 대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 이규의 후손이 ⇒ 16세인 이인정(이인정)을 파조(파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 17세인 이관(李琯)을 파조(파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李蒨)의 후손이 ⇒ 이천(李蒨)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 이매(李邁)를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의 후손이 ⇒ 이과(李薖)을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후손이 ⇒ 이조(李蓨)를 파조로 하고 그의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15세조인 ⇒ 15세(15세 조상)인 *이강(李康+羽)의 후손이 ⇒ 이강(李康+羽)을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 21세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조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 19세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 이존중(李存中)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하는 그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 ⇒ 중소파(中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 상서공파(尙書公派)의 <오신(五臣)집> 중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팔별(八鼈)집> 중 ⇒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 그리고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계대에서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집>을 들 수 있다.
조선조에 상서공후 <백사(白沙)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후 *<8별집>에서 ⇒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 국당공후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집>에서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