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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경주이씨) - 1

녹전 이이록 2022. 10. 26. 07:23

(경주이씨) - 1

 

여기 실린 자료는 모 홈페이지에 게재된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등에서 인용한 글로 잘못 표기된 내용이 있어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다음에 수정하여 올립니다.

 

< (경주이씨) >

 

본관(本貫) : 경주(慶州)

시조(始祖) : 이알평(李謁平)

 

유래(由來 ):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6(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1세조(一世祖) 1. 1^ 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총섬(李寵暹)

소판공 거명의 *9세손 8세손. 9^ . 총섬(寵暹)이 고려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오인유(吳仁裕남궁 원청(南宮元淸이윤관(李允貫) 등과 더불어 오묘(五廟 : 제후의 묘)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에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함으로써 면학의 기풍을 고취시켰다.

 

이제현(李霽賢)

1287(충렬왕 14) 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 · 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 역옹(*饑翁. 櫟翁력옹).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 까지 올랐다. ..........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權溥)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 · 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 ·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과 역옹패설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李穡)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익재는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그의 저서(著書)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소악부(小樂部)에 칠언절구 한시(漢詩)로 번역하여 실은 17()의 민간가요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흥상(李興商) 이흥적(李興啇)

?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연(子衍).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에 이르렀다.

 

1453(단종 1) 계유정난 당시에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로서 수양대군의 지시를 받고 김종서 (金宗瑞)의 집에 가서, 김종서와 그 아들 승벽(承璧)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1454년에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고, 145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

 

소견)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일세조(一世祖)一世(1). 1^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은 ‘1세조가 아니고 ‘1(=1)’. ‘1^ 입니다.
중시조 1(중시조 1세인 조상)는 소판공 이거명입니다.

 

중조 1세를 ‘1세조로 읽고 41항렬을 ‘41세손으로 읽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이를 중시조 1세로 읽고 41항렬은 41세손이 아닌 41세로 읽어야 합니다.

1세조는 바로 나의 윗대인 아버지를 말하거나 기준의 윗대를 ‘1세조(=1대조)’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