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동본 불혼 – 3
모 카페에 게재된 좋은 자료이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문제는 형수혼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형수혼은 남아 있는 풍습이다.
멀리 진도 같은 남도 땅의 바닷가에서는 으레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졌다.
이 관행은 하나의 미풍이었다.
생활력을 상실한 형수와 그 아이들, 즉 조카들의 양육을 동생이 책임지는 행위는 어찌 보면 대단히 사회도덕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있다.
형수혼은 동북아시아 제 종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한 풍습이다.
형수혼의 본래 의미는 형제 일처혼에서 유래한다.
인류학자들은 일처다부제와 형제일처혼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형제일처혼을 일부일처제의 변형으로 간주, 일부일처제에 바탕을 둔 결혼에 불과하다고도 본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처다부제와 일부다처제는 합성적인 결혼이다.
즉 그것을 만들어낸 배우자 몇 명이 하나의 커다란 체계에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의 전형을 근거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처자매혼은 홀아비가 된 남자가 죽은 아내의 자매와 결혼하는 관행이다.
한 마디로 처제와의 결혼이다.
이 역시 세계혼례사적으로는 자매일부제에 해당한다.
가령, 칭기즈 칸은 두 자매를 아내로 맞이했다.
남자들이 여자를 여럿 거느리는 일부다처제는 문명국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상대 여자들이 동일 혈통인가, 전혀 다른 남남인가 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처자매혼은 '자매형 일부다처제'에 해당된다.
모건은 이 혼례방식에서 '아득한 옛 조상들의 푸날루아혼 관습의 자취를 발견한다.'고 언급하였다.
인류학자 브론스키는 이를 '역연혼' 과 '순연혼' 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역연혼' 은 과부가 죽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고, '순연혼' 은 홀아비가 죽은 아내의 동생과 재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각각 형제일처혼 또는 자매일부혼과 결합해서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역연혼' 과 '순연혼' 에도 형제일처혼과 자매일부혼에 작용했던 '연장순의 원칙' 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앉은 가마혼, 누이바꿈, 삼혼이란 풍습이 있었다.
앉은 가마혼(일명 대들이 풍습)이란 과부가 된 여자가 개가할 때 남자 집으로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여자 집으로 오는 결혼이다.
과부 집으로 들어온 남자는 이전 남편의 부모, 즉 여자의 시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로 칭한다. 시부모들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맞아들인 남자를 자식처럼 대우하는 풍습이다.
일부일처제 풍습과는 모순되는 형식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 뿐더러 가족의 틀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다. 또 오랜 과거의 유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서류부가혼 풍습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모계 사회적 흔적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앉은 가마혼 역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가는 모계사회적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누이바꿈은 가난한 집에서 혼례를 치를 만한 돈이 없으므로, 신랑. 신부 집에서 서로 딸을 교환하여 혼례를 치르는 방식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던 집안끼리 널리 행해졌다.
삼혼은 누이바꿈이 고도로 발전한 형태인데, 갑이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상호간에 딸을 바꾸는 다소 복잡하고 연쇄적인 혼례 관행이다.
우리가 한문식의 성씨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원시씨족공동체 단계에서 이루어진 족외혼은 어디까지나 같은 씨족끼리 혼인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시 씨족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씨족명은 성으로 옮겨졌다.
애초에 성은 권력층에게만 부여되었다.
성씨의 부여는 일종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성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성이 없이 이름만 주어졌다.
씨의 설정은 성의 양적 증가에 따르는 동족의 지역적 확대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밀양 손씨, 안동 권씨, 해주 최씨 같이 씨칭이 지명을 취하고 있음은 그것이 지역적으로 분화된 동족의 계통임을 드러낸다.
14 ~15세기 이후에는 인구증가에 따라 동족 성원의 양적 확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본관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본관의 사용은 대략 14세기 말부터였다.
그리하여 본관 수가 김씨는 500가지, 이씨는 470가지를 헤아렸다.
동일한 본관도 동족 수 증가에 따라 다시금 파로 나뉘었으니, 전주이씨의 경우에는 무려 100여 파로 갈라졌다.
이쯤 따지고 보면, 성이 같다는 것만으로 혈연의 근본을 따짐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족보상에서 성씨와 본관만 가지고 혈족의 이동을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성씨를 바꾸는 변성 등으로 혈통 분간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안동의 권씨와 김씨는 분명히 같은 조상으로 김씨가 권씨로 성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근래에 양쪽이 혼인함을 꺼리지 않음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수광는 <지봉유설>에서,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혼인하니 이 때문에 중국인에게 조소를 당한 것이다.'라고 이본동성혼을 비방하였다.
민법의 예규에는 남양 홍씨는 토홍과 당홍이 있으나 조상이 같으므로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
는다.
반대로 성은 다른데 본은 같은 동본이성, 예컨대 기씨, 한씨, 선우씨는 성은 다르나 소위 기자의 같은 자손이라서 혈통이 같다 하여 서로 결혼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도 이성동본이면서 같은 혈족에 속한다.
대저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적어서 오늘날 족보를 가진 가문도 십수 대 위는 모르므로 동성끼리도 그저 관향만 다르면 다 통혼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우리나라의 김. 이씨는 대성으로 본관만 다르면 다 동성혼인을 하니 크게 예에 어긋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7년(190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형법대전>은 혼인조에서 성씨와 본관이 동일한 사람이 결혼하는 일을 100대의 매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성과 동본, 이성과 이본과의 관계는 '칼로 두부 베듯이' 명료한 것이 아니다.
친인척간의 결혼을 금지시킴으로써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손을 이어가고자 했던 선조들의 입장은 대단히 과학적인 판단이었고, 후대에 근친혼을 배제한 태도 역시 인륜을 옳게 세우려는 훌륭한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면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려던 관습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둔갑한다.
근친혼 금지를 논할 때면 흔히 중국의 예를 인용하곤 하는데, 정작 중국 본토보다 우리가 더욱더 강하게 금지되어 있으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모든 혼례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사회의 규칙 속에는 나름의 합법칙적인 연원이 있고 마땅히 어떤 풍습이 강조되어야 할 사회적 이유가 존속해야 관습은 유지되는 법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동성동본 불혼의 역사적 뿌리부터 재평가하면서 출발해야 옳을 일이 아닌가.
[출처]동성동본, 혼인과 불혼의 수수께끼| 작성자 고요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