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국의 시호 탐구 - 1

녹전 이이록 2022. 9. 14. 08:04

한국의 시호 탐구 - 1

 

다음 블로그 익구 닷컴에 게재된 글로 좋은 내용이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1. 시호란 무엇인가?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한 개인의 상징인 이름()을 존중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있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임금, 부모, 스승 앞에서나 썼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피휘(避諱) 전통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대신한 자(), (), 시호(諡號) 등을 썼다.

 

우리 선조들은 피휘를 지켜 조상이나 군주의 이름과 같은 이름은 절대로 작명하지 않았다. 임금의 본명에 들어가는 글자는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에 사용이 금지됐다.

정조(正祖)의 휘인 산()처럼 대다수 임금들은 왕자의 이름을 지을 때 벽자(僻字- 흔히 쓰이지 않는 낯선 글자)로 지었다.

아예 없는 글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래야만 피휘 하기 쉽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는데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더했다.

시호(諡號)란 죽은 이의 행적을 살펴 붙여주는 존호(尊號)의 일종이다.

왕족, 제후, 공신, 학자를 비롯한 빼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 등이 죽으면 나라에서 시호를 올리거나 하사했다.

이순신과 제갈량이 받은 충무(忠武)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호 가운데 하나다.

 

시호도 넓은 의미의 호이지만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평가하여 국가가 망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특히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易名之典)이라고 하여 당사자나 자손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시호는 대개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큰 벼슬을 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청간(淸簡), 서경덕은 문강(文康), 조식은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반면에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음에도 시호가 없는 경우에는 교우나 제자, 친지나 고향 사람들이 추도하는 의미로 시호를 짓기도 했다.

 

나라에서 지어준 시호와 구별하여 사시(私諡)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정할 때 보통 세 가지 안을 내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한다. 1안을 수망(首望). 2안을 부망(副望), 3안을 말망(末望)이라 부른다.(비단 시호를 정할 때뿐만 아니라 사람을 뽑거나 할 때도 이러한 3안제를 쓴다).

 

2. 시호 짓는 법

 

시호는 살아있을 때의 업적을 참작해 몇 개의 자()로 집약한다. \

본래 시호의 취지는 착한 일을 한 분에게는 선시(善諡)를 주고, 나쁜 일을 한 이에게는 악시(惡諡)를 주어 후대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고 신하가 왕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시호 제도를 폐지한다.

 

진시황은 자신을 시호로 부르지 말고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도록 명했으며 다음 왕을 이세황제(二世皇帝), 삼세황제(三世皇帝)라 하여 자자손손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과연 진시황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이후 시호 제도는 부활해서 점점 정교하게 발달했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후대로 내려올수록 악시를 짓는 일이 줄어들고 좋은 뜻의 시호만 짓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

시호를 한번 지으면 거의 고치기 힘든 점에 비추어 기왕이면 좋게 지어주려는 경향은 옛날부터 있은 모양이다.

논어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위()나라 대부였던 공어(孔圉)의 시호가 어째서 ()’이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듣기에 따라 시호 인플레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자는 명민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에 그를 이라 이른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설명한다.

 

시호로 쓰는 글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문()뿐만 아니라 충(), (), (), (), (), (), (), () 등 많이 쓰이는 시자(諡字)에는 다양한 뜻이 있다. 시호에 담긴 뜻을 시주(諡註)라고 하는데 어떤 뜻의 글자를 받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구분된다.

 

()의 경우만 해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충성스럽고 믿을 수 있으며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學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비롭고 은혜롭다(敬直慈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敏而好學)/ 백성을 슬퍼하고 은혜롭게 하며 예로 대접한다(愍民惠禮) 등의 많은 시주가 있다.

 

결국 공자가 공어의 시호가 문()이 된 것은 그의 행적에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민이호학(敏而好學) 등의 장점이 있으니 그런 시호를 받을 만하다고 평한 것이다.

단 한 가지 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취해 시호로 삼아 악을 숨겨 주고, 오로지 악행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악시를 주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자주 쓰이는 시자에 다채로운 시주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오늘날 묘비명에도 악행은 좀처럼 기록하기 미안한 것과 매한가지 논리이리라.

 

조선 조정에서 올린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여기서의 문이 경천위지(經天緯地)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이황의 문순(文純)과 이이의 문성(文成)에서의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도덕박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경천위지 다음의 위상이었을 것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죽었을 때 그의 첫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훈구파가 이는 너무 과분하다며 논박하며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에서 박문다견(博學多見)의 문으로 시주도 바꿨다.

 

이를 볼 때 시자에 딸린 시주에도 어느 정도의 등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호로 쓸 수 있는 글자와 각 글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해 놓은 것을 시법(諡法) 또는 시호법이라 한다.

조선초기에는 194자였으나 글자 수의 부족으로 시호 정하기가 어려워지자 세종(世宗)이 명해 301자까지 늘어났으나 활용 빈도가 높았던 글자는 약 120자 정도다.

 

대표적인 관련 문헌으로 당()의 주석가 장수절(張守節)사기(史記)를 해설한 사기정의(史記正義)의 한 편인 시법해(諡法解)와 북송(北宋)시대 문장가 소순(蘇洵)시법등이 있다.

 

소순이 찬한 시법에는 311조에 168개 시자가 수록되어 있어 시호를 결정하는데 참고했다.

인터넷에 정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법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의 기록,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직관고(職官考),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시고(諡考)편 등을 참조할 수 있으나 방대하고 산재해 있어 찾아보기는 힘들 듯싶다.

다행히 이민홍 충북대 교수가 시법시법해를 묶어 번역한 책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