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회상록(24)

녹전 이이록 2022. 8. 23. 08:09

회상록(24)

 

이양우(전 국회의원) 종친님이 한 때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가 활동이 미미할 때 앞장 서 종친회를 일으켜 세운 내용을 글로 나타내었습니다.

 

나는 종친회 재기의 주역임을 자부한다.

 

나는 경주이씨의 익재 이제현(역옥패설. 익재난고/익재문집의 저자) 할아버지의 21대 후손이다.

 

(익재공은) 고려 말 한 시대의 수필원조로서 이 나라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놓은 분이라 자랑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경주이씨 시조 표암(瓢巖) 알평공(謁平公), 즉 표암재(瓢巖齋)를 시조 발상지로 신라 6부 촌장 중의 수부(首府) 촌장으로 기원전 117년에 태어났다.

 

이에 관하여 잠간 부연하자면

 

()는 천서(天瑞), ()는 표암(瓢巖), 시호(諡號)*문선공(文宣公) 또는 은열왕(恩烈王)이라 전한다.

 

혁거세 거서간 때에 개국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각간, 아찬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83년에 20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사후 법흥왕 때 *문선공(文宣公) ==> 충헌공의 시호가 내려졌고, 태종무열왕 때 왕으로 추존되어 은열왕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경주 이씨의 시조이며 이알평 이후 족보가 실전되어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 봉후(封侯) 6촌장(六村長)의 수장(首長)이니 좌장(座長)이니 하고 혁거세(赫居世) 옹립(擁立) 좌명공신(佐命功臣) 위태사태부(爲太史太傅) 성국대부(成國大輔) 총재(冢宰) 위섭진도위사(爲攝津都尉使) 섭접왕사(攝政王事) 연위태사공(延爲太史公)

 

() 성열왕비(聖烈王妃 : 태화공주(泰華公主)

기씨(泰華公主 箕氏) 마한 태조(太祖)의 딸
아들 : 이유(李侑)
손자 : 이타(李它)
태화공주 기씨(太華公主 箕氏)는 삼한시대와 신라 건국 초기의 인물로 알천양산촌장인 알평의 정실부인이며 고조선과 마한왕 준왕의 딸이다. 운제 부인의 증조할머니이다.

 

고조선계 사람으로 아버지인 준왕은 위만의 쿠데타에 패하여 남으로 내려와 마한의 왕이 되었다.

 

사후 남편 알평이 656(태종무열왕 6) 왕으로 추봉되면서 왕비에 추봉되어 성렬왕후(聖烈王后)에 추증되었다.

 

경주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부인의 친정어머니였다고 한다
운제부인[雲帝夫人]
신라 남해차차웅의 비.
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영일현의 서쪽에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에 여기에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하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부인 알영(閼英)과 마찬가지로 운제부인 역시 신모(神母), 즉 농업신(農業神)으로 후세까지 신앙되었다.“

 

이러한 나의 시조 내력을 숭상하고 배근지무(培根枝茂)를 북돋아 보려는 <慶州李氏中央花樹會>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에 종친회의 운영 실수로 문을 닫은 바가 있었다.

 

나는 이러한 종친회 소위 <경주이씨주앙화수회>의 마비상태를 복구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자부한다.

 

그 연유는 1980년대 명칭 중앙화수회 임시사무국 국장 이순희(, 국회사무처장) 씨께서 내가 운영하는 <양우당> 사무실에 방문하여서 이었다.

 

이때 이분이 가지고 온 것이 <표암재> 시조경모비의 사진을 가지고 족자 인쇄를 하여 팔러 온 것이다.

 

살펴보니 아트지로 인쇄한 영인본이기에 족자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이것을 팔아서 기금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설명이다.

 

당시에 회장이라는 분은 노동청장 이철우 씨였다.

 

이분과 또 다른 분은 이민우 총재(, 신한민주당 총재, 국회의원) 종친이 맡고, 태광그릅 이임룡 회장이 고문이라고 하였다.

 

다행이 이임룡 종친께서 2천만 원을 융통해줘서 사무실을 마련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더 이상의 운영대책은 전무한 상태, 사무국장 거동비도 염출이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 내가 몇 푼을 희사하고, 고심 끝에 건의한 것이 <표암지>를 창간해 줄 터이니 팔기만 하라고 다짐하였다.

 

사무국장은 그렇다면 판매는 자신한다고 장담을 하는 거였다.

 

이에 나는 고무되어 내 자비로 출판비를 충당할 터이니 화수회를 활성화하자고 제의하였다.

 

한 호를 내고 두호를 내고 3호를 냈는데 첫 호를 발간하자마자 전국 종친의 호응도는 열화 같았다.

 

이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덕분이었다.

 

삼성과 이병철 회장과, 에버랜드 안에 미술관을 화보에 대폭 소개함으로 고무되어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병철 회장의 비서 서상희 씨가 방문하고 현장 답사를 한 후에 내게 통보가 왔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묵혀놓은 사저, 혜화동 주택과 수백평의 대지를 기증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화수회 사무실을 이 저택으로 이전하고 새로운 분위기로 전국 종친에게 통보를 하고 세 채비로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는 이성우 전 내무부 차관이었던 종친이 회장을 맡았을 때였다.

 

모든 공과에는 구경꾼이 공로자로 변신하게 되어있는 법인가 보다.

 

내가 이러한 일을 추진 할 적에는 구경만 하던 분들이 서로가 앞을 다투어 공로자라 앞을 선다.

 

그렇거나 저렇거나 나는 나의 할 도리를 하였으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는 것이다.

 

이른바<표암>이라는 종친회지는 내가 창간한 연유고, 경주이씨 종보(신문형식)도 내가 10회까지를 발간하여 임계 하여 주었다.

 

그 후로 화수회는 일사천리로 막히는 일 없이 발전하여 대화수회 건물이 세워졌고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조상을 위해서 바친 은덕은 공과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에 대한 연유는 남겨두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남긴다.

 

오늘의 화수회가 건재하게 됨인즉 부족하지만 후손 한 사람으로서의 내 할 도리를 하였다고나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