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제사 – 2
중국 제사에 대한 좋은 자료가 있어 이를 복사하여 올립니다.
2) 종묘 제사
A) 묘(廟)와 무덤(墓)
조상신이 인간을 돌본다는 조령사상은 자연스레 조상신을 받드는 종묘건축물을 만들었다. 예기의 제의 조에 보면 “제사를 지내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대 이전의 고문헌에는 종묘라는 말은 자주 나오지만 무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상주시대의 제사는 무덤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뜻이다.
제사는 종묘에서만 지냈다.
a) 종묘
상주시대의 종묘 건축을 발굴하였다.( 그 이전 시대는 유적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문헌에는 ‘종묘는 조상이 거주하는 집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종묘는 살아있는 왕이 살고 있는 궁전 건축물과 구조를 같이 하여 지었다.
궁전 건축물의 기본 구조는 前朝後寢(전조후침)이다.
앞쪽은 왕의 집무실이고, 뒤쪽은 왕가가 생활하는 공간이다.
종묘 건축도 궁전과 같이 전조후침의 양식으로 지었다.
상나라의 유적지인 ‘소둔’의 발굴에 의하면 왕궁과 종묘로 추정되는 건물이 마을 공동체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주변에는 많은 제사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에는 *5기이 거마기가 묻혀있었다.
또 머리가 없는 인간의 유골이 49구가 묻혀 있었다.
동물도 묻혀 있고, 순장한 인골도 나왔다.
이것은 당시에 제사 의례를 어떻게 치루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제사에는 동물과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사후의 생활을 위해서 거마와 하인까지도 같이 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묘는 인간이 제사라는 의례를 치루면서 조상과 만나는 장소였다.
종족이 종묘에 모여서 조상에게 각종 제사를 지내면서 제물을 봉헌하여 잘 보이므로 조상신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였다.
뿐만 아니고 조상신이 해꼬지를 하지 말아주기도 기원하였다.
또 제사를 지내면서 정치적인 문제들도 회의를 하기도 하였다.
b) 무덤
무덤이란 장례를 치루어 떠나보낸 귀백이 땅으로 돌아가는 전용시설이다.
상주시대의 무덤은 덧널 무덤 형식을 취한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상자형 덧널을 만들어서 구덩이 안에 설치하였다.
시신을 담은 널을 그 안에 안치하였다.
구덩이를 파서 매장하는 것은 ‘매장시설의 밀폐’를 중요시 하였음을 뜻한다.
무덤의 밀폐는 땅으로 돌아간 혼백이 인간이 사는 바깥세상과 격리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역경’에 “옛날 장례는 섶나무로 두텁게 입혀서 들 가운데에 장사지내고, 봉분을 올리지 않았다. 주위에 나무도 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상주시대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간 정혼이 귀백과 만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고 믿었으므로 만남을 차단할 목적으로 밀폐된 무덤을 만들었다.
하늘로 올라간 정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의를 주재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중계를 해주어야 한다.(우리의 굿이란 것도 중간에 무당이 중계를 해주어야 가능하다.)
또 특정한 장소(종묘)에서 행하였다.
따라서 매장이 끝나고 나면 묘지를 돌 볼 필요가 없었다.
봉분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서 묘지라는 것을 표시할 이유가 없었다. - 不封不樹(불봉불수)
*종묘와 무덤의 차이점
1) 종묘는 일반적으로 성읍의 중심에 둔다. 무덤은 촌락의 변두리에 둔다.
2) 종묘는 궁전 건축물을 모방하여 전조후침 구조가 기본이다. 좌우에 곁방을 둔다.
3) 종묘는 역대 조상 신령에게 제사를 받드는 장소이고, 종교집회, 정치집회를 여는 장소이
다. 무덤은 단지 상장의례만 집행하는 일회용 장소이다.
2) 종묘 제사
채옹의 독단하(獨斷下)에 의하면 전조후침 구조에서 朝에 해당하는 앞부분은 묘에 해당하고, 뒷부분의 침은 역시 침이라고 하였다.
묘에는 즉 당(堂)에는 세 발 솥을 열을 지어서 늘어놓고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제사 의례를 행하는 곳이다.
뒤편의 寢에는 조상의 의관, 지팡이 등 유품을 보관하고, 진열하는 곳이다.
종묘의 앞부분인 조당(朝堂)에는 昭穆(소목--종묘 안에 위패를 모실 때 조상의 위패를 순서에 의해서 배열하여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앙에는 太租를 모시고, 2, 4, 6代 등 짝수의 조상을 좌측에 모시고 이를 昭라고 하며, 3, 5, 7代 등 홀수의 조상을 우측에 모시고 이를 穆이라고 불렀다.)의 순서에 따라서 위패를 모셨다.
그 위패 앞에서 각종 제사 의례를 베풀었다.
침(寢)은 조당의 뒤편에 두고 조상이 평소에 쓰던 유품을 두어서 후손이 조상의 평소의 생활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하였다.
채옹의 저서는 동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동한 시대에 베풀었던 것들이다.
그 전에도 이렇게 제사를 모셨는지는 모른다.
a) 商代(사천의 촉나라)의 제사
1980년대에 사천성 광한시 삼성퇴에서 다량의 청동 예기와 제기를 출토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조상의 영에 대한 제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한다.
이 유물을 통하여 제사가 집행된 의례를 추측해 본다.
b) 시제(尸祭)
시제라는 제사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옛 문헌에 시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예기에 “제사에는 시동이 있고, 이가 종묘의 주제자이다.”라는 글로 보아서 시(尸)는 종묘 제사와 관련이 있다.
1984년에 강소성 단도사 대평 북산정에서 춘추 말기 때 오나라 어느 왕으로 생각되는 무덤을 발굴하였다.
이 무덤에서 시(尸)의 수수께끼를 풀 약간의 단서가 출토되었다. (유물 등 여러 가지 발굴 자료는 생략하고-----)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尸(시)는 立身像(입신상)을 말한다고 한다.
사람이 조상의 영혼으로 분장하는 것을 시동이라고 하였다.
시동은 직계 후손이거나 제자가 맡아서 제사를 주재하였다.
문헌자료로서는 반고가 쓴 백호통(白虎通)에서 "옛날 사람들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동일 종족의 자손을 선발하여 ‘시동’으로 분장 시켰다.
조상의 영혼은 형체가 없고, 소리가 없읍므로 이 시동이 대신하여 후세 자손이 올리는 음식 공양을 받았다.” 이 기록으로 시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시제의 의례 과정을 주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예절대로 제사를 끝마치면 종과 북이 울린다. 제주도 일어서고, 축사는 제가 끝났음을 알린다. 여러 신이 얼큰하게 취하였고, 시동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간다.
쇠북을 치면서 돌아가는 시동을 배웅한다. 혼백은 이제는 돌아 가셨네. 한다.”
의례에는 그 외에도 시동을 맞이하여 제사를 치루는 제사의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