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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 - 1

녹전 이이록 2022. 5. 30. 08:52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 - 1

 

네이버 모 블로그에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39)^ 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는 글인데 인터넷에서도 검색되는 글입니다.

 

경주이씨의 유래. 분파. 분적. 인물에 대한 장문의 글이 올라 있는데 많은 내용에서 잘못이 있어 이를 [..............]로 지적하고 아래에 소견)을 올립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잘못된 말입니다.

(. . )파명 뒤에는 몇 세손(=대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몇 세(=)로 말하여야 합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39)’이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 (=39대 손)’이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후손(=39대 후손)’이다.

나는 중시조님의 38세손(=38대손)이다.

나는 국당공의 22세손(=22대손)이다.

 

소견)

 

제목부터가 잘못 기술되었습니다.

국당공파 39세손은 잘못 말한 것입니다.

 

중시조 39항렬은 국당공파 39(=39)’ . ‘국당공파 39^ (=39대 손)’ . ‘국당공파 39세 후손(=39대 후손)’ . ‘중시조님의 38세손(=38대손)’ . [국당공파의 38세손(=38대손) . ‘국당공의 22세손(=22대손)’이라고 나타내어야 바르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라고 파명 뒤에 몇 세손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파명 뒤에는 몇 세(=)’로 말합니다.

국당공파 39... 국당공파 39....

 

왜냐하면 몇 세손은 조상과 후손 간에 항상 윗대 조상을 기준으로 아랫대 후손을 헤아려 읽은 수 뒤에 붙여 읽는 용어로 사람(조상과 후손)과의 관계를 묻고 답할 때 나타내는 용어이지 조직. 단체를 나타내는 파명의 뒤에 붙여 ○○공파 몇 세손(=대손)’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없습니다.

 

○○공파 몇 세(=)’ 중시조 39(=39)’. ‘익재공파 39(=)’라고 읽거나 말해야 합니다.

중시조 39항렬은 아래와 같이 나타내면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 39(=39) ‘()’ 항렬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39) ‘()’ 항렬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39항렬로 ’39^ 입니다. ’38세손’39세 손은 뜻이 다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 ’39세 후손(=39대 후손)‘ 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 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후손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님(1) 이거명)’38세손(=38대손)‘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중시조 17세 이천)22세손(=22대손)입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月城李氏 월성이씨)

 

[유래]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은 신라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왕이 된 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신라 유리왕 9)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1세조로 하고 있다.

 

[*아찬(阿粲)]

阿餐(아찬)이라고도 함.

 

[*32(신라 유리왕 9)*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32(신라 유리왕. 서기 32)에 양산촌 이씨 급량부이씨(及梁部李氏)로 성을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신라 법흥왕 23년 시호(諡號)를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1929표암(瓢巖)’지에 한자로 시조의 시호를 문선(文宣)으로 나타내고 있기는 하나 이 시호는 공자님의 시호를 피휘(避諱)하는 입장에서 시조에게 시호로 내렸을 리가 없다.

몇 군데 자료에서 문선공(文宣公)이 아닌 충헌공(忠憲公)으로 기록하고 있어 중앙화수회에 수정을 건의를 하였다.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며

 

- ‘이알평의 36세손이란 표기는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35세 계대에 소판공(휘 거명) 1세를 더하여 ‘36^ ’. ‘36세 후손‘36세손으로 잘못 말한 것이다.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1세조로 하고 있다.]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1(1^ . 1세인 조상)로 하고 있다.

 

-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1^ ‘1세 조상으로 나타내는 것은 바르나 ‘1세조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1세조는 나를 기준으로 나의 아버지를 ‘1세조(=1대조)’라고 하고 할아버지를 2세조(=2대조)라하며 증조부는 3세조(=3대조). 고조부는 4세조(=4대조)...등으로 읽거나 말한다.

 

[가문의 번영]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 상신 8,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문신과 무신 전체 과거 합격자는 우리나라 여러 성씨 중 10위이고 무신은 6위이나 문신은 10위권 밖이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위 문장 전체]

 

14대파 중 상서공파오신(五臣)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다음은 익재공파의 세칭 ‘8(八鼈)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안에서 버금으로 인물을 배출하고 다음이 국당공파의 정순공파(휘 성중) 계통의 매죽헌(매죽헌) 이완(李浣) 대장 집안이 유명하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백사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백사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화곡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매죽헌집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이 고려 때의 경주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이제현은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임금을 섬기며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성철 스님. 아명박 대통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