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 - 1
네이버 모 블로그에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39대)^ 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 있는 글인데 인터넷에서도 검색되는 글입니다.
경주이씨의 유래. 분파. 분적. 인물에 대한 장문의 글이 올라 있는데 많은 내용에서 잘못이 있어 이를 ▲[..............]로 지적하고 아래에 소견)을 올립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다. - 잘못된 말입니다.
(대. 중. 소)파명 뒤에는 몇 세손(=대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몇 세(=대)로 말하여야 합니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39대)’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손(=39대 손)’이다.
⇒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후손(=39대 후손)’이다.
⇒ 나는 중시조님의 38세손(=38대손)이다.
⇒ 나는 국당공의 22세손(=22대손)이다.
소견)
‘제목’부터가 잘못 기술되었습니다.
‘국당공파 39세손’은 잘못 말한 것입니다.
중시조 39세 ‘상’항렬은 ‘국당공파 39세(=39대)’ . ‘국당공파 39세^ 손(=39대 손)’ . ‘국당공파 39세 후손(=39대 후손)’ . ‘중시조님의 38세손(=38대손)’ . [국당공파의 38세손(=38대손) . ‘국당공의 22세손(=22대손)’이라고 나타내어야 바르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손’이라고 파명 뒤에 몇 ‘세손’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파명 뒤에는 ‘몇 세(=대)’로 말합니다.
국당공파 39세... 국당공파 39대....로
왜냐하면 ‘몇 세손’은 조상과 후손 간에 항상 윗대 조상을 기준으로 아랫대 후손을 헤아려 읽은 수 뒤에 붙여 읽는 용어로 사람(조상과 후손)과의 관계를 묻고 답할 때 나타내는 용어이지 조직. 단체를 나타내는 파명의 뒤에 붙여 ‘○○공파 몇 세손(=대손)’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없습니다.
‘○○공파 몇 세(=대)’ 즉 ‘중시조 39세(=39대)’. ‘익재공파 39세(=대)’라고 읽거나 말해야 합니다.
중시조 39세 ‘상’항렬은 아래와 같이 나타내면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 39세(=39대) ‘상(相)’ 항렬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39대) ‘상(相)’ 항렬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39세 ‘상‘항렬로 ’39세^ 손‘입니다. ’38세손‘과 ’39세 손‘은 뜻이 다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 ’39세 후손(=39대 후손)‘ 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손‘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파 ’39세 후손‘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중시조님(1세) 이거명)의 ’38세손(=38대손)‘입니다.
나는 경주이씨 국당공(중시조 17세 이천)의 22세손(=22대손)입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月城李氏 월성이씨)
[유래]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은 신라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왕이 된 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아찬(阿粲)에]
⇒ 阿餐(아찬)이라고도 함.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 32년(신라 유리왕. 서기 32년)에 양산촌 이씨 ⇒ 급량부이씨(及梁部李氏)로 성을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 신라 법흥왕 23년 시호(諡號)를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1929년 ‘표암(瓢巖)’지에 한자로 시조의 시호를 문선(文宣)으로 나타내고 있기는 하나 이 시호는 공자님의 시호를 피휘(避諱)하는 입장에서 시조에게 시호로 내렸을 리가 없다.
몇 군데 자료에서 문선공(文宣公)이 아닌 ‘충헌공(忠憲公)’으로 기록하고 있어 중앙화수회에 수정을 건의를 하였다.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36세손이며]
⇒ 후손에 대한 계대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며
- ‘이알평의 36세손’이란 표기는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35세 계대에 소판공(휘 거명) 1세를 더하여 ‘36세^ 손’. ‘36세 후손’을 ‘36세손’으로 잘못 말한 것이다.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로 하고 있다.]
⇒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1세^ 조. 1세인 조상)로 하고 있다.
-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을 ‘1세^ 조’ 나 ‘1세 조상’으로 나타내는 것은 바르나 ‘1세조’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1세조는 나를 기준으로 나의 아버지를 ‘1세조(=1대조)’라고 하고 할아버지를 2세조(=2대조)라하며 증조부는 3세조(=3대조). 고조부는 4세조(=4대조)...등으로 읽거나 말한다.
【 [가문의 번영]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 문신과 무신 전체 과거 합격자는 우리나라 여러 성씨 중 10위이고 무신은 6위이나 문신은 10위권 밖이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위 문장 전체]
⇒ 14대파 중 ‘상서공파’의 ‘오신(五臣)집’ 중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다음은 ‘익재공파’의 세칭 ‘8별(八鼈)집’ 중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안‘에서 버금으로 인물을 배출하고 다음이 국당공파의 정순공파(휘 성중) 계통의 매죽헌(매죽헌) 이완(李浣) 대장 집안’이 유명하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화곡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매죽헌집’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이 고려 때의 경주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 이제현은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임금을 섬기며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성철 스님. 아명박 대통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