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전 선생님께 (2신) - 2
답신을 받아들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제 딴에는 글줄이나 좀 읽었다고 우쭐거렸던 자화상이 떠올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은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두 번 세 번 읽어야 이해가 되겠구나. 여겨집니다.
몸도 많이 불편하신데 이렇게 장문의 답을 주셔서 송구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1. 저의 선친께선 호적에는 술병 鍾(종)으로 되어 있으나 어찌된 셈인지 평소에는 쇠북 鐘(종)을 쓰셨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조부께서 선친의 이름을 지으실 때 작명법에 따라 획수를 조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하고 짐작만 합니다.
아무튼 선친의 항렬은 술병 鍾(종)이 맞습니다.
2. 오랜 세월동안 세계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시조세수는 하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하며 저는 중시조세수로 38세임을 꼭 마음에 두겠습니다.
3. 어떤 분이 세손과 대손은 등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표현할 때 '누구의 몇 세손'으로 해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대손=세손’이라는 말씀이지요?
4. 선생님께선 ‘익재공후 판윤공파’라고 말씀하셨는데, 저의 경우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요?
그냥 익재공파 38세, 익재공 할아버지의 21세손으로 말하면 되나요?
5. 족보 회복 문제는 선생님이 알려 주신대로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몇 년 전에도 대전에 있는 경주이씨 익재공 화수회에 연락을 했으나 만족스런 답을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대동보 추보 발행이 예정되었다니 잘 될 것 같습니다.
* 추신 : 저는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일각에선 저 같은 사람을 고맙게도 재야 사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외로운 늑대라'고 부르지요.
왜냐하면 책을 집필할 때 조수 또는 조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자료수집과 집필, 퇴고, 출판 등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저 스스로 자조적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혹시 독서는 하실 수는 있는지요?
독서가 가능하시고 역사물을 좋아하신다면 우리 근대사를 추적한 저의 졸저를 선생님께 보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시고 말씀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녹전 선생님의 자세하고도 정성스러운 회신에 감사드립니다.
더위에 건강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당에서 O우 드림
3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좌석이 정해져 있는 열차는 매우 드물었고 먼저 자리에 앉는 사람이 그 좌석의 주인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고향에서 상경할 때 밤 열차를 타면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에야 서울역에 떨어졌지요. 그 때는 교복 가슴에 한자로 새겨진 이름표를 달고 다니던 때였습니다.
이미 자리가 만석이라 입석으로 먼 길을 가려고 작정을 하고 있는데 좌석에 앉은 어떤 중년 신사 한 분이 제 명찰을 물끄러미 보더니 '본관이 어디냐?' 고 묻더군요.
그래서 경주라고 말씀드렸더니 '무슨 파냐?' 물어서 '익재공께서 할아버지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갑자기 좌석에서 일어나더니 고등학생인 저에게 저리를 양보하시더군요.
그래서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그 분의 강권에 못 이겨 그 자리에 앉아서 마음이 불편한 여행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같은 시대에 살면서 왜 이렇게 항렬 차이가 나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옛날에 아무리 조혼을 하고 또 조혼을 한다 해도 몇 대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그 이유를 여쭈었던 겁니다.
선생님 말씀은 잦은 전란을 겪으면서 정확하지 못한 자료가 족보에 반영되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지요?
짐작은 가지만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항렬의 높고 낮음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과문해서 그런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군요.
‘O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