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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이제현) 선생 - 1

녹전 이이록 2022. 2. 21. 08:43

익재(이재현) 선생 - 1

 

충선왕의 원나라 여자

 

1309년 익재 이제현이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다가 죄를 얻어 유배를 가더니 복위되어 귀국하자(원나라 조정에 있다가 고려로 돌아옴.)하게 되었다.

임금에게 정든 여인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그를 따르던 원나라 여인이 따라 귀국하려 했다.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그 여인에게 이별의 징표로 주어 되돌려 보냈다.

귀국하는데 원나라 여인을 대동하여 같이 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에 돌아온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원나라에 가서 그녀를 만나보게 하였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다시 갔을 때, 그 원나라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지경이었다.

여인은 겨우 붓을 들어 시 한 구절을 썼다.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
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

 

그러나 왕을 염려한 이제현은 이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충선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여인이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고하였다.

충선왕이 노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여자라는 뜻이었다.

 

다음해 임금의 생일 때에 이제현이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대죄를 청하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충선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이제현이 그제야 여인의 시를 올리며 그때 일을 말했다.

충선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때 이 시를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아갔을 터인데, 공이 나를 사랑해 일부러 다르게 말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그 뒤로 이제현은 충선왕의 각별한 신임을 더 얻게 되었다.

 

벼슬길을 물러난 뒤

 

1356년 친명파와 신진사대부 일각에서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반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그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1357년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제현은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후 관작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성리학자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공민왕과 우왕은 그를 수시로 불러들여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주로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백문보, 이달충 등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료들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국사를 집필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만년에는 집에서 지내면서 공민왕의 명을 받고 실록인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을 편찬하고, 종묘(宗廟) 위패(位牌)의 서차(序次)를 정하였다.

 

한편 공민왕이 불교 승려 출신 신돈을 총애하는 것에 반발하여 신돈의 골상 등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책인 국사國史편찬하면서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이달충(李達衷), 백문보(白文寶) 등과 함께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유고는 후일 조선건국 초기 고려사 편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죽은 뒤에 경상북도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책들 중 현전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4, 습유 1권이 전한다.

1504(연산군 10) 후손 이사균 에 의해 충청북도 청원군 수락영당(水洛影堂)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1546(명종 2)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 후손 이반기에 의해 영호사(靈湖祠)가 건립되었으며, 그 뒤 전라남도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전라남도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 등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