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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본관과 유래

녹전 이이록 2021. 11. 23. 08:45

이씨의 본관과 유래

- 정곡 이양우


[()씨의 본관]

 

이씨는 우리나라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大姓)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며 명문의 지위를 굳혀온 거족(巨族)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홀륭한 인물을 숱하게 배출하였다.

 

이씨의 유래를 계통별로 분류하면 신라 육촌(六村)중 알천 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인 이알평(李閼平 : 표암공)이 시조인 경주이씨 계통이 있고,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계통과 당나라 장군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함께 따라와 귀화(歸化)한 연안이씨의 시조인 이무(李茂) 계통이 있으며, 중국 한 문제(漢文帝)때 사람인 고성 이씨의 시조가 된 이반(李槃)24대손 이황(李璜)과 김수로왕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전하는 인천 이씨의 시조인 이허겸(李許謙), ()나라 출신으로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진 청해 이씨인 시조 이지란(李之蘭), 중국 농서 출신인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낸 안악 이씨의 시조 진()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경주이씨의 유래]

 

시조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及梁部급량부)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이다.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애초에 경주 박바위(瓢巖표암)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다.

 

기원전 117년 한 무제 원수 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밝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켜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賜姓)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신라 유리왕 9)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꼐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 알평의 원대손(遠代孫) -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사실적인 계대가 아님.) 으로 신라 진골 출신인 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거명은 신라 말 때의 인물로 진골(眞骨) 출신이다.

 

*그는 시조 알평의 36세손이며 그는 시조 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며 시조로부터 *현재(熙字돌림)까지는 현재 熙字(희자) 돌림까지는 *대략 75(2,000)가 된다. 2,000년이 된다.

 

- 경주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고려 말기)에서 14대손 ~ 18대손에서 크게 14대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중소 80여 파로 분파된다.

 

- 경주 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8대파로 거명의 15~16대손에서 14대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중소 80 파로 분파된다.

 

소견)

 

경주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고려 말기)에서경주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16대손과 17세손으로 읽는 방법을 달리하여 나타낸 것이나 이는 대손=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씨의 발전]

 

8대파는 (중시조 본손 계통)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다.

 

이밖에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삭제. 직장공파(直長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 등이 있다.

 

한편 경주이씨 *분파도(分派圖) 분적도(分籍圖)에는 전술한 *10본의 분적종 8본의 분적종 *성주이씨와 합천이씨. 차성이씨와 우계이씨는 거명의 윗대에서 분파되었으며 나머지 아산 이씨. 재령 이씨. 원주 이씨. 진주 이씨. 장수 이씨는 그 아랫대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 상신 8,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14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 李恒福)집이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익재공파의 세칭 8() 집과 완()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 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齊) 이제현(李齊賢. 1287~ 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일곱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인(李公麟) 이공린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