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慶州李氏) - 1
부산광역시 역사문화대전에 올라 있는 글입니다.
[정의]
이거명을 시조 ⇒ 중시조로 하고, 이빈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이씨(李氏)는 문헌에 451본 혹은 546본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시조가 밝혀진 성씨는 120본 내외이고, 그중 100여 본 정도가 현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이씨 성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보면 32년(유리왕 9) 신라 6부 촌장에게 사성(賜姓)한 6성 중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조차도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에서 진흥왕(眞興王) 대에야 등장했다는 통설에 비추어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는 하나 그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이씨가 100여 개 본이라고 하지만 그중 주류를 이루는 관향은 불과 30본 내외이다.
100여 본을 계통별로 분류하면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으로 신라 유리왕(瑠璃王) 때 이씨로 사성 받은 알평계(謁平系)가 경주이씨를 주종으로 하여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이씨와 거기서 분관된 가평· 재령· 아산 이씨 등이 있으며, 당나라에서 귀화한 연안이씨,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둘째 아들로 모성(母姓)을 따라 허씨로 했다가 당나라 현종(玄宗)으로부터 이씨로 사성 받은 인천이씨, 원나라에서 귀화한 청해이씨 등으로 구분된다.
경주이씨 외에도 동래에 입향한 이씨는 안산이씨, 인천이씨, 차성이씨 등이 있다.
잘못된 내용에 대한 소견)
▲[*우리나라에 이씨 성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보면 32년(유리왕 9) 신라 6부 촌장에게 사성(賜姓)한 6성 중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조차도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에서 진흥왕(眞興王) 대에야 등장했다는 통설에 비추어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는 하나 그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소견)
연구자에 의한 통설이라고 하나 아직 확인된 성씨의 원류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남의 성씨를 함부로 이보다 오래되지는 않았다든지 하면 진한 6부의 6성씨는 어떻게 되는가?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는 하나 그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라는 말은 결국 중시조 이전의 경주이씨의 성씨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조차도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에서 진흥왕(眞興王) 대에야 등장했다는 통설이라면 왕통으로 그 윗대 시조인 김알지까지도 연계시켜 경주김씨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 설명되고 왕씨 성인 박. 석씨의 성씨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기술할 것인가?
경주이씨는 계통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사서에 있는 기록대로라면 신라 건국 전 6촌 시대부터 6부를 거쳐 고려 초 6부 즉 940년경에 ‘중흥부’라고 고쳤다.
고려시대의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신라 초 이전 양산촌부터 고려 초 중흥부까지 약 1000년을 이어왔는데 위 설명대로라면 알평은 경주이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조차도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에서 진흥왕(眞興王) 대에야 등장했다는 통설에 비추어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는 하나 그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라는 글은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남의 성씨에 대하여 함부로 부정하는 식으로 거론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이씨와 거기서 분관된 가평· 재령· 아산 이씨 등이 있으며,]
수정)
신라 때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이씨와 경주이씨에서 분관된 합천. 차성. 우계. 재령. 아산. 원주. 진주. 장수 이씨 등이 있으며
소견)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전주이씨와 거기서 분관된 가평· 재령· 아산 이씨 등이 있으며’ 에서 전주 이씨에서 분관된 분적종으로 ‘가평· 재령· 아산 이씨’를 거론하였는데 잘못된 기술이다.
경주이씨에서 분관된 분적종으로 ‘합천. 차성. 우계이씨’가 ‘시조후손’에서 분관되고 아산. 재령. 원주. 진주. 장수 이씨가 중시조 후손에서 분적 되었으니 위 문장 ‘ ~ 거기서 분관된 가평· 재령· 아산 이씨 등이 있으며,’는 삭제해야 한다.
[연원]
경주이씨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인 표암공(飄巖公) 알평을 비조(鼻祖)로 삼고, 신라 때의 인물로 진골 출신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을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중시조로 삼고 있다.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중시조로 삼고 있다.]
소견)
글쓴이가 경주이씨 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을 ‘실질적인 시조’라고 하였습니다.
경주이씨 시조는 ‘실질적인 시조’가 있고 ‘형식적인 시조’가 있는 것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본관은 발상지 (알천)양산촌이 뒤에 경주로 바뀌었기 때문에 경주로 했으며, 경주의 옛 이름이 월성(月城)인 까닭에 월성이씨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