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관향과 시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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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寧川)이씨
시조는 이능간(李凌幹).
1320년(고려 충숙왕 7)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상왕을 호종하였으며 뒤에 재궁(梓宮)을 모시고 돌아왔다.
26년에는 지사사우상시(知司事右常侍)로 나라에 공을 세워 면좌당(免左堂)이란 액호(額號)를 사림으로부터 받았다.
32년(충혜왕 2)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조적의 난을 평정, 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관향을 영천으로 삼았다.
인구수 9만5473(1985).
◈ 영천(永川)이씨
시조는 이문한(李文漢).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냈다.
영천이씨는 시조의 6세손 이후의 연계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때 영양군(永陽君; 영양은 영천의 옛 이름)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을 비조로 하는 파와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전을 기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인구수 8663(1985).
◈ 영해(寧海)이씨
시조는 이연동(李延東).
고려시대에 문하시랑을 지냈고, 나라에 공을 세워 영해군에 봉해져 완산(完山)으로부터 이적, 자손들이 영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2042(1985).
◈ 온양(溫陽)이씨
시조는 이흥서(李興瑞).
조선 선조 때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함으로써 선계를 잃고 손자 이만대(李萬代)가 조부가 쓴 《난중향기(亂中鄕記)》를 근거로 이흥서를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2475 (1985).
◈ 용궁(龍宮)이씨
시조는 이정식(李禎植).
선계는 여주이씨로 전해오나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다.
고려 때 그의 둘째아들이 아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가 폐한 사실이 관에 알려져 그의 3남이 각각 유배되었는데 후손들이 유배 전의 세거지인 용궁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653(1985).
◈ 용인(龍仁)이씨
시조는 이길권(李吉卷).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사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師三重大匡)에 책록되었고 구성백(駒城伯; 구성은 용인의 다른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2만 7389(1985).
◈ 용천(龍川)이씨
시조는 이밀(李密).
고려 때 도등고 판관(都登庫判官)을 지냈다고 전해지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99(1985).
◈ 우계(羽溪)이씨
시조는 이양식(李陽植) ⇒ 이구(李球)
- 경주이씨 분적종으로 대종보에는 분적시조를 '이구'로 하고 있다.
우계이씨는 경주이씨 ‘시조 후손’에서 분적한 분적종이다.
대종보의 우계이씨 소개에서 시조는 이구(李球)이고 그의 4세조가 이양식(李陽植)이다.
- *원래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47세손. 중시조 12세 이선용(李宣用)의 둘째 아들로 고려 인종 때 중서사인좌복야(中書舍人左僕射)를 지냈다. ⇒ 삭제 - 시조의 47세손도 아니고 *47세손. 중시조 12세 이선용(李宣用)의 둘째 아들도 아니다.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江陵)의 속현이던 우계현에 터를 잡아 관향을 삼고 분적함으로써 우계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이양식
인구수 1만 4191(1985).)
이구(李球)는 이양식(李陽植)의 현손(4세손)이다.
◈ 우봉(牛峰)이씨
시조는 이공정(李公靖).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 잠성은 우봉의 다른 이름)에 녹훈되었다.
그 뒤 자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그를 시조로 하고 우봉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잇고 있다.
또한《고려사》에도 그는 우봉인으로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하였다.
인구수 1만 7513(1985).
◈ 울산(蔚山)이씨
시조는 이철(李哲).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훈으로 학성군(鶴城君; 학성은 지금의 울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433(1985).
◈ 원주(原州)이씨
시조는 이춘계(李椿桂).
고려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고, 인종과 의종 때 병부상서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중국 진(秦)나라 사람으로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 진한(辰韓)에 피난해 왔는데 옛일이어서 세계가 불확실하고 신라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진민(李眞民)이 원조(遠祖)라고 한다.
인구수 2781(1985).
◈ 원주(原州)이씨
시조는 이신우(李申佑).
고려 목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뒤 나라에 세운 공훈으로 원주백에 봉해졌으며 호장으로 원주에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경주에서 분적, 이관하여 원주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분적 초에는 익흥(益興)을 관향으로 삼았으나 중시조 *13세 ⇒ 23세 경원군(慶源君) 이반계(李攀桂)의 뜻에 따라 원주로 바꾸었다.
*경주이씨 대종보에는 경원군(휘 반계)을 원주이씨 파시조로 하고 있다.
인구수 5만 6001(1985).
◈ 음죽(陰竹)이씨
시조는 이방서(李方瑞).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했고, 이천(利川)에 정착하였다.
그 뒤 후손들이 음죽(이천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였다.
인구수 303(1985).
◈ 익산(益山)이씨
시조는 이문진(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大學博士文部典書五經博士)로 공신후(功臣侯)가 되었고, 백제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 익산의 옛 이름)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익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제를 이어왔다.
인구수 1624(1985).
◈ 익흥(益興)이씨 – 원주이씨
시조는 이반계(李攀桂), 혹은 이시정(李時楨).
선계는 원주이씨(原州李氏)이며, 이반계(중시조 23세)는 원주이씨 시조 이신우(李申祐. 중시조 12세)의 *12세손 ⇒ 11세손으로서 고려 때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원주에서 분적, 익흥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편 호장(戶長) 이신우(李申祐)와 장령(掌令) 이시정(李時禎)을 각각 시조로 전하는 문헌들도 있다.
인구수 60(1985).
◈ 인천(仁川)이씨
시조는 이허겸(李許謙).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러 소성백(邵城伯; 소성은 지금의 인천)에 피봉 되었다.
본래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모비(母妃)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이허겸의 10대조 허기(許奇)가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를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이허겸까지 이· 허 2성으로 내려오다가 이허겸을 관조로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6만 1045(1985).
◈ 임천(林川)이씨
시조는 이현(李玄).
본래 회골인으로 고려 말 귀화하여 공양왕 때 통사(通事 ; 通官통관)의 공으로 임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인구수 457(1985).
◈ 장수(長水)이씨
시조는 이임간(李林幹) ⇒ 이직간(李直幹)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상서 병부판(尙書兵部判)을 지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장천은 장수의 다른 이름)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2421(1985).
◈ 장성(長城)이씨
시조는 이병규(李丙奎).
1451년(문송 1)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郎)에 이르렀다.
그 뒤 후손들이 장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457(1985).
◈ 장흥(長興)이씨
시조는 이원성(李元成).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의 선계나 그 밖의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수 2117(1985).
◈ 재령이씨
시조는 이우칭.
고려 때 보조공신(補祚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가 재령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재령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경주가 본관이었다.
따라서 재령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다.
인구수 4만 5417(1985).
◈ 전의(全義―禮安)이씨
시조는 이도(李棹).
공주(公州)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고자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 진군을 멈추게 되자 도강책(渡江策)을 주도한 공이 커, 삼한개국 익찬이등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開國翊贊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에 책록되고 전산후(全山侯; 전산은 전의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전의의 이성산(李城山) 아래 거주하게 되어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예안이씨가 전의이씨에서 분관되었기 때문에 흔히 전의· 예안이씨라고 한다.
인구수 12만 3371(1985).
◈ 전주이씨
시조는 이한(李翰).
전주에 토착해온 명문 태생으로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고, 문성왕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
이한의 선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전주에 세거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한 이후 18세손 ⇒ 18세^ 손(시조의 17대손)인 이안사(李安社; 穆祖목조)에 이르기까지 전주에서 호족으로 세거하고, 시조의 묘소도 전주에 있기 때문에 본관을 전주로 하게 된 것 같다.
이한의 후손 중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 이린(李隣)· 이의방(李義方) 등은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 관직에 있기도 했다.
그 뒤 이성계의 직계 선조는 동북면으로 이주,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임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가 시조 이한의 22세손인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전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그 뒤 27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손이 크게 번성, 현달하여 파계(派系)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성씨를 이룰 때 제왕은 조상으로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왕자, 즉 대군이나 군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하였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이안사의 선계에서 갈라지는 파와 그 이후에서 갈라지는 파를 합하여 모두 123파가 된다.
인구수 237만 9537(1985).
◈ 정선(旌善)이씨
시조는 이양곤.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금(金)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에 와 경주에 정착함으로써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관향을 정선으로 삼게 된 것은 8세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인구수 3107(1985).
◈ 정주(貞州)이씨
시조는 이세화(李世華).
1231년(고려 고종 18) 광주안무사(廣州按撫使)로 있으면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고 뒤에는 사재경(司宰卿)을 지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주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345(1985).
◈ 진보(眞寶―眞城)이씨
시조는 이석(李碩).
진보현리를 지낸 뒤 생원시에 합격했다.
<시조공 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보면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1364년(고려 공민왕 13) 홍건적을 평정,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이석은 충렬왕과 충선왕 때 인물이라고 하였다.
진성(본래는 진보였는데, 진보성을 줄여 진성이라 부른다)을 관향으로 삼게 된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에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인구수 5만 8877(1985).
◈ 진위(振威)이씨
시조는 이자영(李自英).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진위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본관을 진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경주이씨로 시조 이거명(李居明)의 후예라고 한다.
인구수 4018(1985).
◈ 진주이씨
시조는 이군재(李君梓 ⇒ 君榟군재).
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그는 성품이 곧아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 성천(成川)으로 유배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대제학을 사임하고 진주로 낙향한 형 이영재(李英梓. 중시조 18세. 군재는 동생)를 생각, 본관을 진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인구수 1만 3591(1985).
◈ 차성(車城―機張)이씨
시조는 이위(李渭).
신라 말 또는 고려 사람이라는 양분된 설이 있다.
그가 차성군(車城君; 차성은 기장의 옛 이름)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차성에 세거하면서 관향 역시 차성으로 하여 경주이씨에서 분적 하였다,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038(1985).
◈ 창녕(昌寧)이씨
시조는 이정현(李正賢).
고려 원종 때 태어나 충선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뒤 창산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4029(1985).
◈ 천안(天安)이씨
시조는 이립상.
《기사보(己巳譜)》에 보면 그의 행적이 나와 있지 않고 서문에도 천안으로 관향을 삼은 뒤 1세 이상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이립상은 한 파의 기세조인 듯하다.
인구수 1968(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