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 존호고(孔子尊號考)
- 장봉혁 지음 <學易宗述. 1998년 간행>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blog.daum.net/bhjang3/6580204 ‘두메산골’ 에 올라 있는 글입니다
좋은 자료이기에 일부만 복사하여 올립니다.
- 생략 - )
3. 공자에게 추봉된 시호들
역사적으로 공자에게 올려진 존호(尊號)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왕(帝王) 들로부터 올려진 존호는 대략 13회가 되는데, 그 내용을 시대 순으로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이부(尼父)
공자의 명(名)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의 애공(哀公) 16연(B.C.479) 4월 을축(乙丑) 11일 서거하심에, 애공이 조문할 때에 [오호 슬프도다 이부여!]라고 하였는데 이부에 대하여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은 시호 (諡號)라고 한 반면, 근세의 사학가인 양백준(楊伯峻)은 춘추좌전주(春秋左傳注)에서 말하기를 [당시 애공의 나이가 유소(幼小)하여 70이 넘는 노웅에게 부(父)의 칭호를 베풀었다]고 하여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한서(漢書)의 평제기(平帝紀)를 살펴보면 서한(西漢)의 11대 제왕인 평제(平帝) 원시원년 (元始元年 : AD1년)에 [공자를 포성선니공으로 시호를 추증하였다(追諡孔子爲褒成宣尼公)]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공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시호(諡號)를 봉한 첫 기록이다.
포(褒)는 ‘못잊어 기린다.’는 뜻이고, 성(成)은 집대성(集大成), 선(宣)은 문선(文宣)의 뜻으로 보인다.
㉢ 문성니부(文聖尼父)
공자에게 두 번째로 추봉(追封)된 공식적인 시호로서,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6연(AD.492)에 [문성니보라 고쳐서 시호를 올리고, 공묘(孔廟)에 고하였다(改諡文聖尼父, 告諡孔廟)]라는 기록이 위서(魏書)의 고문기(考文紀)에 보인다.
㉣ 추국공(鄒國公)
주서(周書)의 선제기(宣帝紀)와, 북사(北史)의 주선제기((周宣帝紀)에 기록되기를 대상이 년(大象二年 : AD. 580)삼월 정해(丁亥)에, 공자를 추국공으로 진봉하였다(詔進封孔子爲 鄒國公)]고 하였는데, 청나라의 이름난 사가였던 양옥승(梁玉繩)은 [人表考]주에서 공자의 출생지와 무관한데 추국공에 봉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추국공이라는 봉호(封號)는, 맹자에게도 송(宋)나라 원풍(元豊) 6년(1083)에 추봉된바 있다고 곡부현지(曲阜縣志)에 기록되어 있다.
㉤ 태사(太師)
공자에게 올려진 봉호(封號)의 한가지로서, 구당서(舊唐書)의 고종기(高宗紀)와 예의지(禮儀志) 에 기록되기를, 당나라 고종 건봉 원년(乾封元年:666) 1월에 공자묘를 넓혀서 사우(祠宇)를 개수(改修)하고 태사의 봉호를 추증하였다고 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諡號)의 한 가지로서,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7년(739) 8월 갑신 에 공선부(孔宣父)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하였다고 구당서(舊唐書)의 현종기(玄宗紀)에 기록이 있다.
문선(文宣)이란 뜻은 귀족계급의 전유물이었던 글을 만천하 아랫 백성들에게 베풀어 보급하였다는 뜻으로, 이후에도 문선(文宣)이라는 어휘를 끼워서 시호가 진봉(進封)되는 일이 거듭되었다.
여기에서 공선부(孔宣父)라는 말은, 공자에 대한 존칭으로 당나라 태종년간에 부르기 시작한 존호(尊號)이다.
㉦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의 한 가지.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원년(大中祥符元年:1008) 10월 무오(戊午)에, 공자에게 제왕 (帝 王)이라는 시호를 추봉하고자 하나, 혹자가 말하기를 제호(帝號)는 부당하다고 하니, 드디어 현성문선왕이라고 시호를 올렸다고 송사(宋史), 진종기(眞宗紀)에 보이고 있다.
현성(玄聖)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의 어머니가 흑제(黑帝)를 몽감(夢感)하여 공자를 나으셨 으므로 현성이라 한다는 구절이 춘추위(春秋緯)의 연공도(演孔圖)에 있다.
후한서의 중장 통전(中長統傳)에도 공자를 현성으로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장자서(莊子書)의 천도(天道)편에서도 현성이라는 어휘가 보인다.
㉧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지성(至聖)이라는 뜻은 지극한 성인 또는 최고의 성인으로,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 끝부분 에 사마천(司馬遷:145-86B.C.)이 공자의 업적을 논하는 글 가운데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 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至聖)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自天子王侯, 中國言六藝者, 折中于夫子, 可謂至聖矣!)]고 하여, 처음으로 공자를 지성(至聖)이라 호칭하였다.
현성문선왕이라 시호를 올린지 4년 후인 1012년 12월 임신(壬申)에 개시(改諡)하여 지성 문선 왕(至聖文宣王)이라 하였다고,
송사(宋史) 진종기(眞宗紀)에 나타나 보이고 있다.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에게 올릴 수 있는 가장 의미가 깊은 시호. 최고의 예우와 정중한 예의를 다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원나라 7대 제왕이었던 무종(武宗), 대덕(大德) 11년(1307)7월 신사에, 지성문선왕 (至聖文宣王)을 대성지성문선왕으로 가봉(加封)한 것이라고 원사(元史)의 무종기(武宗紀)에 보이고 있다.
지성(至聖)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성인, 문선왕은 제왕과 권문세족들의 전유물인 글의 이치를 아랫백성들에게까지 끌어내려 베풀어준 왕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대성(大成)의 의 미를 가봉하였는데, 맹자서의 만장하(萬章下)에 나오는 집대성에서 연 유된 어휘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물됨을 백이(伯夷) 이윤(伊尹)과 유하혜(柳下惠)와 견주어 표현하면서, 공자는 성지시자(聖之時者)인데 아울러 집대성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집대성(集大成)이란 악기연주를 비유한 말로서, 한가지의 악기로 연주하는 소성(小成)도 아니요, 악기연주의 일변(一變)으로 끝나는 일성(一成)도 아니며, 여러 가지 악기, 즉 금(金) 석 (石) 사(絲) 죽(竹) 토(土) 초(草) 목(木) 포(匏)로 연주하되, 일변일성(一變一成)이 아닌 구변 (九變)의 종성을 집대성이라 하는 것이다.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인물 의 일을 모아서 대성인(大聖人)의 일로 만 들었다는 뜻으로, 공자는 지(知)에 다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덕(德)에 온전하지 않는 게 없다는 의미의 대성(大成)인 것이다.
그래서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사가(史家)들도 공자에게 올려진 시호 중에 대성지성문선왕 (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가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경학사(經學史)를 서술하면서 공자의 시호를 이것으로 기술하여 놓고 있다.
이 시호는 공자의 인물됨과, 학문의 업적, 다함이 없는 지(知)와, 온전한 덕을 조화있게 표 현하여 올려진 시호로 여겨진다.
원나라 무종(武宗)은 시호를 올린 두달 후인 9월에 [孔子에게 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加封한 것을 백성에게 알리는 碑文(비문. 加封孔子 大成至聖文宣王 詔書碑)]을 새겨 세웠다.
이 글에 [공자가 아니면 공자이전의 성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자가 아니면 공자 이후의 성인이 본받지 못할 것이니, 이른바 요순(堯舜)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시고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밝히시어서, 백왕의 모범이 되었으니 만세의 사표가 되었도다. (蓋聞先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明 後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法 所謂祖述堯舜 憲章文武 儀範百王 萬世師表者也)]고 하였으며, 이어지는 비문에 [짐은 으뜸이 되는 실마리를 이어받고자 아름다운 풍속을 우러러 존경하며, 옛규범에 따라 다스리며, 봉호를 올림에 성대하게 거행하고, 대성지성문선왕이라 호를 추가하며, 큰 소를 잡아 제사를 모신다. (朕纘承丕緖 敬仰休風 循治古之良規 擧追封之盛典 加號大成至聖文宣王 祀以太牢)]고 하여, 지극한 정성을 보이는 문장을 사용하였다.
㉩ 지성선사(至聖先師)
명나라 11대 제왕이었던 세종(世宗:嘉靖) 9년(1530) 11월 신축(辛丑)에 [孔廟의 제사의식을 고쳐서 바르게 하고, 공자의 시호를 지성선사로 정하였다.(更定孔廟祀典 定孔子諡號曰至聖先師)]고, 명사(明史)의 세종기(世宗紀)에 보이고 있다.
선사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면, 맹자는 아성(亞聖), 자사는 술성(述聖), 증자는 종성(宗聖), 안 자는 복성(復聖)이라하고, 공문(孔門)제자들을 일컬어 선현(先賢)이라 하므로, 가장 존숭(尊崇) 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성(四聖), 십철(十哲), 선현(先賢)의 선사(先師)라고 하였다는 기 록이 곡부현지(曲阜縣志)에 보인다.
㉪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
공자에게 추존한 시호의 한 가지, 청나라 세조(世祖 : 순치) 2년(1645) 정월 정미(丁未)에 [공자의 神位(신위)를 大成至聖文宣先師(대성 지성 문선 선사)로 하였다.]는 기록이 청사 (淸史)의 세조기(世祖紀)와 예지(禮志)에 보인다.
여기에서의 대성은 집대성의 대성이 아니고, 옛날 공자께서 찬역(贊易)하여 말하되 "大哉(대재)라 乾元(건원)이여"라 하셨으니, 이르되 대성이요, "至哉(지재)라 坤元(곤원)이여"라 하셨으니, 이르되 지성이니, 참으로 공자의 큰 덕이 아니고서는 건과 곤을 마땅하게 짝 맞추어 표현할 수가 없는 것처럼, 참으로 공자의 큰 덕이 아니고서는 군왕(君王)과 선사(先師)를 겸하여 감 당할 수가 없으므로 선사라 하였다고, 건융(乾隆)년간(1736-1795)에 진사가 되어 복주(福州) 의 지주(知州)를 지낸 반상(潘相 생몰년 미상)이 저술한 곡부현지(曲阜縣志)에 설명되어있다.
㉫ 이상에서 살펴본 11가지의 존호이외에도 당나라 시대 AD637년에 선부(宣父)라는 시호가 추존되어, 모두 열세차례의 시호가 올려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