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소개 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 ‘중앙화수회 소개’ 창에 화수회 소개 글이 아래와 같이 올라 있습니다.
【중앙 화수회 소개
경주이씨는 1946년 3월 26일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에 의하여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가 창립되었으며 본관지인 경주에 시조 알평의 사우 표암재(瓢巖齋)를 관리하는 표암 화수회(瓢巖花樹會)와 서울특별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도에 시도화수회를 두고 전국 시, 군, 구 화수회를 조직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宗勢는 2000년 11월 전국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145만여 명이며 분적종회까지 합치면 185만여 명에 달한다.】
라고 올려놓고 글 아래에 ‘표암재 전경 사진’을 올려놓았다.
大姓(대성)인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소개’를 하는 ‘창’으로는 너무 빈약하고 어울리지 않고 텅 빈 느낌이 드는 페이지로 보인다.
위의 【............】 안의 글 내용과 같이 고쳐 올리기 전에 이 ‘메뉴 창’에 ‘중앙화수회의 소개’. ‘경주이씨 화수회의 시초’. ‘경주이씨 화수회발(慶州李氏花樹室跋) - 금석록(金石錄) 24권(卷24) 27 추록(追錄)’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이 글이 삭제되어 보이지 않는다.
‘화수회 발(跋)’을 삭제? - 기억으로는 위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좋은 내용을 왜 삭제해 버렸는가?
부통령 성재 선생의 현 중앙화수회 창립 내용도 중요하지만 ‘경주이씨 화수회의 시초’ . ‘금석록의 화수회 발(跋)’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경주이씨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데는 꼭 필요한 자료이다.
아래의 글이 모두 삭제하여 버린 글입니다.
【○ 경주이씨 화수회의 시초
경주이씨(慶州李氏) 금석록(金石錄)을 보면 화수회가 발족한 것은 고종 5년 무진(戊辰. 1868)년이다.
경주이씨 화수회(慶州李氏花樹會)란 명칭은 이때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니 이때를 기원으로 하고 기산하는 것이다.
○ 경주이씨 화수회 발(慶州李氏花樹室跋)
- 금석록(金石錄) 24권(卷24) 27에 추록(追錄)된 내용
聖上五年命各姓從長派行此敦敍之大政也
(성상5년 명각성 종장파행 차돈서 지대정야)
- 고종 5년(무진. 1868년) 각 성씨는 장파의 항렬을 따라 이에 서로 돈목하고 위아래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我李氏益齋菊堂尙書三派子孫合行同字鎭
(아이씨익재국당상서3파자손합행동자진)
- 우리 이씨(李氏)는 익재(益齋), 국당(菊堂), 상서(尙書) 3파 자손이 합동으로 같은 항렬자를 지키도록 하였다.
鄕蓮村구草室十餘架以作花樹會之所從長派居也
(향연촌구초실10여가이작화수회지소종장파거지)
- 연촌 마을에 10여간 초가집을 짓고 장파가 거주하는 곳에 화수회를 두었다.
興宣大院君閤下嘉혜慶州李氏花樹室七字念
(흥선대원군합하가혜경주이씨화수실 7자념)
-흥선대원군께서 '경주이씨화수실'이라고 7자를 써서 내려 주셨다.
吾宗之敦睦而비永遵約條之意也
(오종지돈묵이비영준조약지의야)
-우리 경주 이씨의 돈목함을 가상히 여기시고 약조한 것을 영원히 잘 지키라는 뜻이다.
其摹寫刻揭也原本粧池藏于家
(기모사각알야원본장지장우가)
-그 글씨를 본떠 판에 새겨 걸어두고 원본은 싸서 집에 잘 간수해 두었다.
使後孫知我聖上敦敍之化也
(사후손지아성상돈서지화야)
- 이로서 후손들은 우리 임금이 돈목하고 위아래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한 말을 알아야 한다.
戊辰仲秋 裕元謹識 金石錄 卷24 追錄 27
(무진중추 유원근지 금석록 권24 추록27)
-무진년 중추(고종 5년1868년 가을) 유원이 삼가 지음. 금석록 권24 추록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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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까지의 내용으로 삭제해 버린 글이다.
위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고종 5년(무진 1868년) 전국에 왕명으로 각 성씨들은 각기 항렬자(行列字)를 정하고 이에 따라 작명하되 장파(長派)의 항렬자를 따라 통일하여 성명만 보아도 그 관향(貫鄕)과 항렬(行列)을 단번에 알아보고 서로 돈목(敦睦)하고 위아래 차서(次序)를 혼동(混同)해서 망발(妄發)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 장파(長派)인(본래 長派장파는 平理公派평리공파이나 당시 모여서 의논한 파 가운데 중심파를 말함) 익재공파(益齋公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오촌공파(梧村公派)가 세거(世居)하고 있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연촌(現龍亭里陽村部落- 현 용정리 양촌부락)에 모여서 화수회를 창립 발족하고 10여 간 짜리 초가를 세우고 ‘경주이씨 화수실(慶州李氏花樹室)’이라 편액을 걸고 화수회가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 여기서 *진천 문중(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를 따라서 작명키로 의정(議定- 의논하여 결정함)하였으며 – 당시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
오촌공파(梧村公派)가 세거(世居)하고 있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연촌(現龍亭里陽村部落- 현 용정리 양촌부락)에 모여서 화수회를 창립 발족.(고종 5년(무진 1868년)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41세 → 42세 →
○영----규○----종○----○우----상○---○희.◌형— 재○---○호.◌건--
진천문중 항렬자 사용 준용┃진천문중 회의에서 5개 항렬자 제정(38세 ~ 42세)
# 이 화수회 집회소인 화수실에 건 편액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께서 7자를 경사스럽게 크게 써서 내려 주셨다.
# 우리 慶州李氏의 돈목함을 가상히 여기시고 더욱 수족(收族- 일가를 거둠)하여 돈목하라고 장려하셨으니 화수회에서 약조한 것을 영원토록 잘 지켜 나가라는 뜻이다.
# 원본은 싸서 잘 간수해 두고 그 글씨를 본떠 판에 새겨 걸어 두었던 것이다
# 이로 하여금 우리 임금께서 돈목(敦睦)하고 위아래 차서(次序)를 지켜야 한다고 한 말을 우리 후손들이 알아야 한다.
# 무진년 중추(고종 5년 1868년 가을) 유원이 삼가 지음. 금석록 권24 추록 27
▲ [* 당시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 ]
- 1868년 고종5년 무진 중추에 진천 문중(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를 따라서 작명키로 의정(議定-의논하여 결정함)하였으며 1904년 광무8년 갑진에 경산에서 간행한 갑진보에 [行第字亦爲預先講定錄于譜序下以示敦睦之誼(행제자역위예선강정록우보서하이시돈목지의)]에 아래와 같이 항렬자를 기록(대종보 총편 익재공파편 P299)하고 있다.
◯ 경주이씨 항렬제차 제정 시기 구분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 41세 → 42세 -- →
○영----규○----종○- -┃○우---상○---○희.◌형—재○----○호.◌건--
(진천문중 항렬자)------┃(진천문중 회의에서 5개 항렬 제정 1868년)-----┃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제○준◌--○동----병◌심○--○세-----진○--
1904년---(5개 항렬 제정)
- 군수공(휘 계필)이 편찬한 경산 간행 ‘갑진보’에 기록하고 있음.
- 경주이씨 대종보 P 299 行第字(항제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