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36대손 ‘종’자 돌림?
모 종친님께서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원문에 잘못 기술한 곳을 *표시로 지적하고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을 올립니다.
【나는 *경주이씨 36대손 항렬이 종 자 돌림인 익재공파다.
*원시조이신 알(謁)자 평(平)자 할아버지에 *36세(世)이신 거(居)자 명(明)자 할아버지까지는 ‘원대손’이라 하여 *일반족보에서는 제외하고 거명(居明) 할아버지를 1세로 계산하여 족보에 사용한다.
그 후 자손이 번성하여 *16대(代) 익재공- 고려문신. 이름은 제현(齊賢).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1287 ~ 1367.
*22대 창평공 할아버지가 팔형제를 두셨는데 *창평공 할아버지께서 혼례를 치르는 첫날밤 처갓집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큰 자라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꿈을 꾸시고 이상히 여겨 밖을 나가보니 처갓집에서 사위를 먹이려고 자라를 잡아놓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강물에 놓아주었다
모두 여덟 마리를 풀어주던 과정에 맨 마지막 여덟 번째 자라를 풀어주다 잘못하여 새끼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는데 그 후 할아버지는 아들 팔형제를 낳으셨는데 맨 막내 자손에 새끼발가락이 불구로 태어나시어 그 풀어준 자라에 환생 자손이라 믿으시고 팔형제 모두 이름을 고기 어(魚). 거북 구(龜)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으시고 그 후손들은 그 후로 자라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적과 소견) 이이록
우리 경주이씨 조상님들은 족보. 비문. 문헌에 [세=대. 세손=대손. 세조=대조]로 등호(=) 좌우의 용어를 같은 뜻으로 읽고 기록하였습니다.
▲[*경주이씨 36대손 항렬이 종자 돌림인 익재공파다.]
소견)
경주이씨 항렬제차 표에 보면 ‘鍾(종)’ 항렬은 중시조 37세(=37대)이다.
이를 ‘동의론’의 ‘몇 대손’으로는 ’종‘항렬은 중시조님의 36대손(=36세손)이라고 한다.
위 글에서 ‘경주이씨 36대손’은 ‘몇 대손’으로는 바르게 읽었습니다만 이는 아래쪽 글을 읽어보면 ‘2세=1대로 읽는 이의론’으로 읽은 것이다.
‘이의론’의 기본원칙은 ‘2세=1대’로 읽는데 이를 적용하면 ’종‘항렬 37세는 37-1=36. 36대이고 ‘대=대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36대=36대손’으로 읽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의론’으로는 아랫대로는 ‘몇 세손’은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만 읽고 윗대로는 ‘대=대조’로만 같은 뜻으로만 읽기 때문에 아래로 ‘몇 대손’과 위로 ‘몇 세조’로는 읽지 않는다고 한다.
‘몇 세조’로 읽는 것은 윗사람에게는 쓰지 않는 경망스러운 용어라는 말도 있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시조이신 알(謁)자 평(平)자 할아버지에....]
소견)
우리 경주이씨 시조 할아버님은 오직 한 분뿐이다.
그래서 '시조'라고 하지 '원시조'이니 '도시조'라고 하지 않는다.
‘원시조’. ‘도시조’라고 하면 시조 위에 중국이나 타국에서 건너온 또 다른 시조가 있는 새로 밝혀진 윗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36세(世)이신 거(居)자 명(明)자 할아버지...]
소견)
'36세 휘 거명'은 잘못된 ‘시조세수’이다.
‘35대(=세) 상계’ 세수에 중시조세수 1세를 더하여 ‘시조세수’로 읽거나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조 2세부터 중시조 앞대까지 약 900년의 계대는 실전되었기에 계대를 알 수 없어 ‘시조세수’로는 헤아려 읽거나 말하지 않는다.
중시조 '36세' 대신 '시조의 遠代孫(원대손)'으로 말한다.
▲[*일반족보에서는 제외하고 거명(居明) 할아버지를 1세로 계산하여 족보에 사용한다.]
소견)
중시조이신 소판공 휘 거명(諱居明) 할아버지를 1세로 함은 경주이씨 8개 분적종과 14개 대파와 중소 80여개 파가 공통적으로 쓰는 ‘중시조세수’이다.
‘일반족보에서는 제외하고’라고 하였는데 어떠한 족보이든 간에 ‘중시조세수’로 계대를 표시하고 있다.
▲[*16대(代) 익재공... ]
소견)
16대(代) ⇒ 17대(代)=17세(世)
익재공(휘 제현)은 중시조 17세이다.
'2세=1대'로 읽는 ‘이의’논지를 적용하여 중시조 17세를 16대로 읽었다.
'17대=17세'와 같은 뜻이니 ‘17대’로 읽어야 한다.
▲[*22대 창평공 할아버지가 팔형제를 두셨는데....]
소견)
창평공(휘 공린)은 중시조 23세(=23대)이다.
‘동의론’으로는 ‘세=대’로 같은 뜻이니 '23세=23대'로 읽는다.
22대는 중시조 23세인 창평공을 ‘이의론’인 ‘2세=1대’를 적용하여 23세를 22대로 읽은 것이다.
창평공은 22대가 아니고 중시조 23대(=23세)로 읽어야 한다.
▲[*창평공 할아버지께서 혼례를 치르는 첫날밤 처갓집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큰 자라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꿈을 꾸시고 이상히 여겨 밖을 나가보니 처갓집에서 사위를 먹이려고 자라를 잡아놓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강물에 놓아주었다
모두 여덟 마리를 풀어주던 과정에 맨 마지막 여덟 번째 자라를 풀어주다 잘못하여 새끼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는데 그 후 할아버지는 아들 팔형제를 낳으셨는데 맨 막내 자손에 새끼발가락이 불구로 태어나시어 그 풀어준 자라에 환생 자손이라 믿으시고 팔형제 모두 이름을 맹꽁이 민(黽). 고기 어(魚). 거북 구(龜)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으시고 그 후손들은 그 후로 자라고기를 먹지 않는다.]
*八鼈(팔별)은 鼇(오). ?(구). 黿(원). 鼉(타). 鼈(별). 鼊(벽). 鯨(경). 鯤(곤)
*맹꽁이 黽(민). 거북 龜(구). 고기 魚(어) 부수
소견)
이야기 내용이 달라 중아화수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을 복사하여 올립니다.
[자라를 먹지 않는 ‘팔별집’
익재공의 6대손인 공린(公麟)의 현몽(現夢)에서 시작된다.
공린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의 취객(娶客- 사위)이 되었는데 혼례를 치룬 첫날밤의 꿈에 용왕(龍王)이 나타나서 “내 여덟 아들이 지금 사경(死境)에 이르렀으니 어서 구해달라. 그대가 내 여덟 아들을 구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라고 하므로 꿈을 깨어 일어나보니 한밤중이었다.
잠든 신부를 흔들어 깨서 물어보니 신부의 말이 “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사위에게 먹이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항아리에 넣어두었다.”고 하므로 둘이서 8마리의 자라를 꺼내서 10여리 밖에 있는 호수에 방생(放生)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공린은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 8형제를 두었는데 3남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으니 자라 8마리를 방생하러 가는 도중에 죽은 한 마리가 그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8형제를 둔 것은 용왕의 보은(報恩) 때문이라 여겨서 이름을 모두 자라, 거북, 고래, 곤(鯤) 등 물고기의 이름을 붙여서 鼇(오). ?(구). 黿(원). 鼉(타). 鼈(별). 鼊(벽). 鯨(경). 鯤(곤)이라 했는데 한결 같이 글을 잘 지어 <8문장>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8별을 자라의 환생(還生)으로 숭봉하는 가통(家統) 때문이다.
공린은 박팽년의 서랑(壻郞- 사위)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었다가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되면서 30여 년 만에 길이 터져서 무과(武科)를 거쳐 현령(縣令)에 이르렀으나 3자 원(黿)이 사화(士禍)로 인하여 죽자 청주에 유배되었는데 반정(反正) 후에 신원(伸寃- 신분, 재산 등을 본디대로 되돌려 놓음.)되었다.
구(龜)는 문과에 급제, 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아우 원의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충주목사에 이르렀다.
원(黿)은 문과를 거쳐 호조좌랑에 이르렀는데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주자고 건의한 일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기고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는데, 반정 후에 신원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