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 –2 (복사자료)
- 글 金丁鉉 (김정현 ) 씨족사가
‘족보’를 설명한 글에 좋은 글이 인터넷에 올라 있기에 앞 회에 이어 참고로 복사하여 올립니다.
▲ 중국인의 족보는 5세기경 南北朝(남북조)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 족보보다 10세기나 먼저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바로 이웃인데 족보 전래가 이토록 늦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씨 전래가 상당히 늦어진 것이 그 원인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인 前漢(전한)시대에 이미 성씨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때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세워지기 전이다.
우리 민족이 삼국시대에 일부 지배계층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三國(3국)의 건국 전후였다.
前漢(전한)시대와는 200년의 차이가 난다.
실제로 성씨제도가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를 보면, 족보 등장의 시기와 같은 100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 우리나라의 주요 성씨 가운데 거의 절반이 중국에서 뿌리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중국의 漢族(한족)이나 다른 어떤 종족의 후손이란 것이 되고, 순수 韓民族(한민족)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
▲ 조선시대 후기에서 日帝(일제) 치하에 이르는 동안 많은 가짜 족보가 등장했다.
천민이고 常人(상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성씨를 갖게 하고 軍役(군역)· 稅收(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戶口(호구)를 파악하면서 가짜 족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반의 경우 군역과 다른 여러 雜役(잡역)들이 면제되었기에 양반 신분을 사고, 가짜 족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
▲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대한제국 시대에는 「붙인 집」, 「겉다리 양반」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짜 족보를 비꼬는 隱語(은어)였다.
「붙인 집」이란 조상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양반의 족보를 사서 자기 식구들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상업을 해 부유층에 속했다.
「겉다리 양반」은 본래 양반층이었다가 몰락한 경우다.
가문의 후예들이 다시 옛적의 가문으로 돌려놓으면서 그간의 과정을 숨기고 족보를 새로 꾸며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 姦臣(간신)이나 嬖臣(폐신)이 있을 경우에는 족보에서 누락시키는 경우도 있다.
고려 의종 때 쿠데타를 일으켜 武人政治(무인정치) 시대를 연 鄭仲夫(정중부)는 본관이 海州(해주)이다.
「고려사」에도 그의 본관이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現 해주 정씨의 족보에서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해주 정씨는 고려 神宗(신종) 때 사람 鄭肅(정숙)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신종은 의종보다 2代 늦게 재위한 왕이다.
정숙의 윗대는 문헌이 失傳(실전)되어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시조로부터 4~5代까지의 조상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다
▲ 史書(사서)에 나타난 유명 인사인데도 족보에 누락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이었던 安震(안진)이라는 인물이 있다.
본관이 「순흥(김해)」인 그는 진주 촉석루를 재건한 인물이었다.
案山君(안산군)이라는 封號(봉호)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는 유명한 인사였다.
그는 鄭仲夫(정중부)의 경우처럼 逆臣(역신)도 아니었는데도 그의 이름은 웬일인지 순흥안씨 족보에서 보이지 않는다.
△ 족보에 기재되는 문중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日帝(일제)시대 때부터였다.
이때에는 모두 성씨를 가지고 본관도 표기해야 했다.
그간 姓(성)이 없었던 천민이라도 윗대 조상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姓(성)을 붙였다.
인구가 많은 성씨를 자신의 성씨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상전의 본관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본관을 만들었다.
이때는 班常(반상)의 제도가 무너진 터라 이를 단속할 수도 없었다.
△ 중국 唐(당)나라 劉知幾(유지기)라는 학자는 족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조들의 事蹟(사적)에 대해 史體(사체)보다 매우 眩耀(현요)하다』
이 말은 족보에서 자기 조상의 행적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기록하는 것을 비판한 말이다.
족보 편찬에서 과장이 심하면 족보의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조상의 행적에 먹칠하는 꼴이 된다.
◆ 가짜 족보를 만드는 방법
- 다음과 같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첫째, 투탁(投託)
자손이 끊긴 곳에 자신의 조상을 끼워 넣기,
이것은 가난한 중종[문중]에게 돈으로 댓가를 치루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한마디로 양반을 돈으로 사는 것이다.
둘째, 별보(別譜)
붙이기 일가.
투탁이 족보에 정식으로 오르는 반면 별보는 족보 한가운데 끼워 넣거나 부록에 별도로 표시하는 방법이다.
투탁이 잘 이루어져 족보에 직접 기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을 때 별보라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방법은 주변사람들에게 탄로 날 위험은 많다.
세째, 위보(僞譜)
족보를 위조하는 것,
들통 나지 않게 보학에 밝은 사람을 초청하여 위조가 발각되지 않게 철두철미하게 남의 족보를 위조하여 자신이나 그 후손도 철저한 교육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은 대개 돈이 많은 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