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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공 세주종파 40대손’

녹전 이이록 2019. 8. 5. 09:04

경재공 세주종파 40대손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난에서 답변이나 소견. 수정 사항. 건의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저의 파에 대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 까페 둘러본 후 *저의 추측은 *경재공 세주종파..40대손이라는 결론(?)이 나왔는데요.


*그 파의 특색이나..그런 정보는 얻을 수 없을까요?


참고로... 전 돌림자를 음만 따서 이름을 지어 주셨더라구요..


*저희 할아버지 우. 아버지. () 제 남동생 희() 입니다..


저의 조상님들에 대해서 많이 궁금하네요.


[*경재공 세주종파..40대손]


소견)


경재공 세주종파 40대손이 아니고 경재공 세주공파 40라고 해야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경재공(혹은 직장공)은 중시조 24세 휘 세주로 파명은 대파는 '국당공파'이고 중파는 '제정공파'입니다.


경재공과 그 후손은 소파로 분파한 기록이 없어 세주공파라는 파명은 없습니다.


국당공후 제정공파’ ‘경재공 문중아니면 직장공 문중으로 불러야 합니다.


문의자가 중시조 41항렬이면 중시조님의 40대손(=40세손)’이라고 해야 바릅니다.


敬齋(경재) 李世柱(이세주. 직장공).


생몰년은 1498 1595. 자는 屹叟(흘수) 호는 敬齋(경재), 본관은 月城(월성)이다.

신라 佐命功臣(좌명공신) 李謁平(이알평)의 후예이다.

고려시대에 檢校政丞(검교정승)을 지낸 8대조 李世基(이세기) 이후로의 가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시조 16세   8대조 : 李世基(이세기, 호는 松菴(송암), 시호는 文僖(문희), 檢校政丞(검교정승)을 지냄.

중시조 17세   7대조 : 李蒨(이천) 호는 菊堂(국당), 시호는 文孝(문효), 同平章事(동평장사)를 지내고, 月城府院君(월성부원군)에 봉해짐.

중시조 18세   6대조 : 李達衷(이달충), 호는 霽亭(제정), 시호는 文靖(문정), 政堂文學(정당문학)을 지내고, 雞林府院君(계림부원군)에 봉해짐.

중시조 19세   5대조 : 李䇕(이수), 判江陵府事(판강릉부사)를 지냄.

중시조 20세   4대조 : 李興商(이흥상. 李興啇이흥적), 호는 謙灘(겸탄), 시호는 襄僖(문희), 이조판서를 지내고,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에 봉해짐.

중시조 21세    증조부 : 李立+(이휴), 호는 退休堂(퇴우당), 중추부사를 지냄.

중시조 22세   조부 : 李宗元(이종원), 호는 遯齋(둔재), 舒川萬戶(서천만호)를 지냄. 山陰(산음)으로 이주.

중시조 23세   부 : 李完從(이완종), 호는 大山(대산), 掌樂院正(장락원 정)을 지냄.

중시조 24세   기(나) : 李世柱(이세주).


경재의 어머니는 蓮城金氏(연성 김씨)로 목사를 지낸 金益粹(김익수)의 딸이다.

경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영남의 山陰縣[산음현. 현 경상남도 산청군] 月峴(월현)에 옮겨 와 살았다.

경재는 타고난 자품이 빼어나고 穎悟(영오)하여 남보다 뛰어났다.


8세 때 아버지에게서소학을 배웠다.

丹書(단서)敬怠章(경태장)에 이르러 질문하기를

()은 어찌하여 길하며, ()는 어찌하여 흉합니까?”라고 하니,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답하기를

어른을 공경하면 어른이 반드시 기뻐하며 너를 사랑하여 너의 행동을 기릴 것이니 그래서 길한 것이요,

네가 게으름을 피우면 부모님이 노하셔서 너를 미워하여 명예가 손상될 것이니 그래서 흉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경재는 그 말에 깊이 감복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21세 때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겹쳐 당했는데, 효성을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말씀하기를 내일 먼 데서 손님이 이를 것이다. 집에 돌아가서 그 분들을 맞이하여라.”라고 하였다.

경재가 생각하기를 꿈의 일이 평상시와 다르다. 친히 명을 하니 어길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그 날 분부대로 집에 돌아갔다.

李貞禮(이정례)柳公綽(유공탁)이 경재의 지극한 정성을 듣고 가상히 여기며 위로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이정례는 자신의 딸을 경재에게 시집보냈다.


이 때 南冥(남명) 曺植(조식)山海亭(산해정)에서 도를 강론하고 있었는데 높은 풍모가 소문이 났다.

경재는大學(대학)을 가지고 나아가 질문하여 밝히기 어려운 곳을 밝히니, 남명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德溪吳健(덕계오건. 1521-1574)南州(남주)一人이라고 여겼는데 이군이야말로 十室(십실)의 고을에 반드시 忠信(충신)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


또한 남명이 경재의 총명함과 재주로 어찌하여 일찍이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簞食瓢飮(단식표음)으로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으며 명리를 좇지 않는 것이 선조의 뜻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남명이 더욱 탄복하였다고 한다.


경재는 늦게 行誼(행의)로써 천거되어 宣敎郞(선교랑)典涓司(전연사) 直長(직장)에 제수되었고 通訓(통훈)의 품계에 올랐다.

몇 달을 지내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愚仕村(우사촌)에 집을 지어 敬齋(경재)’라 편액하고,戒欲.戒言(계언).戒酒(계주등의 ()을 지어문생들을 면려하였다.

德溪 吳健(덕계 오건. 1521~1574)守吾堂 吳僩(수오당 오한. 1546-1589)東溪 權濤(동 계 권도. 1575-1644)茅谿 文緯(모계 문위. 1554-1632) 등과 종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은 이미 늙었지만 나라는 저버릴 수 없다고 탄식하며, 손자 李哲文(이철문)李哲和(이철화)에게 명하여 忘憂堂 郭再祐(망우당 곽재우. 1552-1617)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도록 하였다.

두 손자가 모두 殉義(순의)하였다.

1595년 향년 98세로 졸하니 모인 사람들이 수백 인이었다.


1. 경재실기(敬齋實紀)

李世柱(이세주. 1498-1595)實紀(실기), 21책의 木活字本(목활자본)이다.

表題(표제)版心題(판심제)敬齋實紀(경제실기)로 되어 있고, 內題(내제)敬齋先生實紀(경재선생실기)로 되어 있다.

四周雙邊(사주쌍변)界線(계선)이 있다.

半郭(반곽)의 크기는 가로 15.8cm 세로 20.9cm이고, 版心(판심)에는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상하 내향 이엽화문 어미)가 있다.

每面(매면)1018로 되어 있다.


2. 간행 경위

경재가 별세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뒤, 그의 12세손 李圭貞(이규정)李圭亮(이규 량)李圭俊9이규준) 등이 경재의 事蹟(사적)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유문을 수습하고 여러 사람들의 글을 받아 간행하였다.

경재가 남긴 글은 병화에 거의 다 사라지고 겨우 시 3수와家訓(가훈) ,三箴(삼잠)이 전부이다.

 여기에다 제현들이 찬술한 글을 덧붙여 21책의 실기를 만들었다.

이 책이 정확하게 언제 간행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이 실기를 편찬ㆍ간행하기 위해 河謙鎭(1870-1946)의 서문을 받았는데, 그 시기가 1928년이다.

그런데 이 책 안에는 하겸진이 1934년에 지은愚溪書堂記 가 실려 있고, 金在植1938년에 지은追遠齋記 가 실려 있다.

이를 보면 이 실기는 1938년 이후에 간행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