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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와 월성이씨 – 2

녹전 이이록 2019. 6. 20. 09:16

경주이씨와 월성이씨 2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난에서 답변이나 소견. 수정 사항. 건의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계림이씨와 월성이씨는 같은 경주이씨 입니다.’


신라 1000년과 이후 지금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경주를 계림. 월성. 낙랑. 동경. 문천. 금오 등으로 불리었는데 이 지역명이 시대가 바뀜에 군명 등으로 불린 기록입니다.


경주를 나타내는 명칭


경주 지역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개국 건도 전후에 국호가 서라벌(徐那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고 나중에 신라(新羅)라고 칭하다가 탈해왕 때에는 시림(始林), 계림(鷄林)이라 하였다가 기림왕 때에 다시 신라라 하고 고려 태조 18년 경순왕 김부가 항복함으로 경주(慶州)로 한 것입니다.


그 뒤 경주대도독부. 성종 때 동경유수. 동경유수사. 현종 때 경주방어사.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에 계림부(鷄林府)라 칭하고 신우(우왕) 때에 낙랑(樂浪). 조선 태종 때에 다시 경주(慶州)라고 옛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나라이름이었든 지명이었든 간에 지금은 모두 경주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정묘보인 경주이씨 대종보에는 경주를 진한(辰韓). 서라벌(徐那伐). 사로(斯盧). 신라(新羅). 계림(鷄林). 월성(月城). 동경(東京). 낙랑(樂浪). 금오(金鰲). 문천(蚊川)이라고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서벌(徐伐). 사라(斯羅). 계림(雞林)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옵니다.


* 고려 말 충렬왕 때 계림부라고 칭하기도 한 것을 근거로 하여 계림을 고려시대부터 불렀다느니 하는 글도 있지만 실지는 신라 초기부터 경주의 시림계림이라고 하였습니다.


진한(辰韓)


- ‘진한6는 학자들의 논문에 의하면 대체로 신라6(新羅六村). 사로6(斯盧六村). 진한6(辰韓六村)’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사로 6중의 하나이고 6부가 되어 급량부(及梁部-梁部)로 개칭하였습니다.


경주지역이 진한 6부이니 논란이 있으나 辰韓(진한)’이라고 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삼국사기에는 [朝鮮遺民(조선유민)山谷之間(산곡지간)六村(6)을 이루어 分居(분거)하였다....이들이 辰韓六部(진한 6)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삼국유사에는 [진한(辰韓)의 땅에 예부터 6촌이 있었다.- 辰韓古有六村 진한 고유 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나벌(徐那伐- 徐伐서벌). 사라(斯羅). 사로(斯盧). 계림(雞林).


- 삼국유사의 기록에 [ 二聖(이성-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나이가 13세에 이른 五鳳元年甲子(오봉 원년 갑자)에 사내아이를 세워 으로 하고 이어서 여자아이를 세워 ()로 삼고 나라이름을 徐那伐(서나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다.


처음 왕이 雞井(계정)에서 태어났던 까닭에 혹은 雞林國(계림국)이라고도 했으니 雞龍(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一說(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始林(시림)숲에서 닭울음소리를 듣고 얻었던 까닭에 국호를 鷄林(계림)으로 고쳤다가 후세에 新羅(신라)라는 국호를 정하였다.]라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 雞林國(계림국)鷄林(계림)이 다른 것으로도 이해되는 글이 있고 어떤 자료에는 같은 뜻으로 이해되는 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자가 다르고 계림국은 나라 이름으로 계림은 지명인 始林(시림)을 계림으로 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월성(月城)


- 본디 월성(半月城- 초생달 모양?)은 신라시대 석탈해 왕 때 왕궁으로 삼아 금성(金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경주 인왕동에 소재하는 반월성 형태의 사적으로 이 월성 터는 1963년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난 200012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습니다.


2000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 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 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 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성을 경주로 말하는 글도 있습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時習)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에서 월성은 경주를 말하고 금오는 남산을 말합니다.


동경(東京)- 고려 성종왕 때


낙랑(樂浪)- 신우왕 때


계림부(鷄林府)- 충렬왕 때


금오(金鰲)


- 금오(金鰲)는 남산의 금오봉 혹은 경주의 남산을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남산은 불국토로 부처님의 세상입니다.(지금도 석불상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남산은 경주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봉우리 또한 현재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으로 표기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남산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편에도 금오산을 '또는 남산이라고 하는데 부의 남쪽 6리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천(蚊川)


- 신라 천년 고도 경주에는 북천과 남천이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서천)에 합류해 동해 바다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천과 남천, 서천은 고려 현종 3(1012) 경주읍성이 축성되자 읍성에서 위치하는 방위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남천은 모래내 몰개내(沙川사천) - 모기내(蚊川문천), 서천은 거칠내(荒川황천), 북천은 알내(閼川알천)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남천(南川)은 문천(蚊川)으로 이곳의 모래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래가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하며 신라왕궁 월성의 해자(垓字)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북천(北川)은 옛날 알천으로 보문단지 쪽에서 흘러 표암봉 앞을 흘러 서쪽의 형산강에 합류하고 남천은 토함산 쪽의 물이 모여 북쪽의 반월성 터 앞으로 흐르다 형산강(서천)과 합류합니다.


대종보에 금오(金鰲)와 문천(蚊川)을 경주 지명으로 보는 이유는 경주에 소재하며 월성(月城)을 경주로 생각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경주이씨 대종보'에 금오(金鰲 - 남산)와 문천(蚊川 - 남천)을 어느 때에 군명(郡名)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