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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죽헌공파? 둔암공파?

녹전 이이록 2019. 5. 23. 09:29

경주이씨 죽헌공파? 둔암공파?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난에서 답변. 소견. 수정)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죽헌공파에 대하여 알려 주십시오.


답변)


.


죽헌공파는 익재공파후 판윤공파후 죽헌공으로 휘는 구징 입니다


이이록


[죽헌공파]


소견)


대종보의 대. . 소파명 90여개 분파명에는 죽헌공파의 파명은 없습니다.


대파가 익재공파로 대파조는 중조 17세 익재공(휘 제현)이시고 중파는 판윤공파로 중파조는 중조 21세 판윤공(휘 지대)입니다.


대파와 중파까지만 분파되어 있습니다.


죽헌공파의 파명은 집안에서만 호칭되는 파명으로 보입니다.


댓글로 올린 답변 중 [죽헌공파는 익재공파후 판윤공파후 죽헌공으로 휘는 구징입니다.]


소견)


익재공파후 판윤공파후 죽헌공으로 표기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으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기록은 속하는 파명을 나타내어 익재공후 판윤공파 죽헌공 문중이라고 함이 종친들 상호간에 알아듣거나 이해하는데 좋을 것 같습니다.


집안마다 격을 높인다고 함부로 집안 파명을 지어 호칭하면 파명이 수천수만 개가 되어 복잡스럽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대종보에 분파된 파명 만으로 호칭함이 바를 것 같습니다.


죽헌 이구징(竹軒 李耉徵)


- 중시조 28세로 익재공후 판윤공파 후손이다.


자는 대년(大年). 호는 죽헌(竹軒). 경주 출생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생몰년은 1609(광해군 1)1688(숙종 14)로 수() 80이다.


아버지는 상일(尙一)이며, 어머니는 아주 신씨(鵝洲申氏) (?)의 딸이다.


7세부터 글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숙천 도호부사로 떠나는 할아버지인 경한(景漢- 판의금. 청와)을 따라 숙천으로 갔으며, 연일(延日)에 귀양 온 *이유성(李惟聖)의 문하생이 되었다.


스승이 영천으로 이배(移配)되자 함께 갔으며, 스승의 아들인 이태운(李泰運)과는 동갑으로서 경쟁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36(인조 14) 향시에 합격하고, 1639(인조仁祖 17)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三等)을 하고 진사가 되었으며, 1657(효종 8)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를 하고 권지와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


1658년 봉상시 봉사, 1659년 박사 겸 봉사, 1660년에 율봉 찰방(栗峰察訪전적· 병조 좌랑을 거쳐 예조 좌랑· 군위 현감· 사헌부 감찰· 진도 군수· 성균관 직강· 옥구 현감· 함안 군수· 사제감 첨정· 제용감 정· 봉상시 부정· 춘추관 편수관 등의 직을 지냈으며, 1688년에 80세로서 부호군에 제수되고, 죽은 뒤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죽헌문집3권이 있다.


* 이유성(李惟聖)

- () 시중(時仲). () 사천(沙川). 본관(本貫) 전주(全州)이다.

소과(小科) 1606(병오) 생원시. 찰방(察訪). 관직(官職) 승지(承旨)


둔암공파


저는 익제공파 42대손인 이재입니다.


그런데 족보에는 遯菴(둔암)공파로 되어 있는데 *익제공파 분파에도 없고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답변)


.


익재공파후 소경공파이시군요.


둔암공파는 소경공파의 지파로 담양이 둔암공파 세거지입니다.


이이록


익제공파가 아니고 익재공파입니다.


益齋익재로 읽습니다.


둔암공파는 중앙화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파명이 아니고 집안끼리만 호칭하는 파명으로 보입니다.


경주이씨 근간 자료인 대종보에는 중파 소경공파다음으로 또 분파된 파명이 없습니다.


집안 내 족보를 발간할 때 둔암공파로 족보명을 하여 파명을 붙였기 때문에 둔암공파로 말하는 것입니다.


파명은 집안에서 함부로 지어 부르지 않습니다.


파명을 붙여 부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종보 발간시 각 대종회에서 충분한 협의를 거쳐 중파. 소파. 지파까지 파명을 부여한 것으로 압니다.


파명 부여에는 각 대종회 별로 중. 소파 전 종인을 대표하는 분들이 모여 충분한 논의 후에 주어집니다.


함부로 자신의 집안마다 파명을 붙여 부른다면 복잡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대체로 이럴 경우 대파 익재공파. 중파- 소경공파. 둔암공 문중(종중. 문회)으로 호칭함이 바를 것입니다.


이를 연이어 호칭할 때는 익재공후 소경공파 둔암공 문중으로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둔암 이석손(遯菴 李錫孫)


중조 23세 이석손(李碩孫) - 익재공후 소경공파이다.


태조(太祖) 정축(丁丑 1397)년에 태어났고 성종(成宗) 신축(辛丑 1481) 714일에 졸()하였으니 수가 85세이다.


초휘는 중손(仲孫). 자는 덕회(德晦). 호는 둔암(遯菴)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에 선발되어 들어가 학문을 기르고 쌓아 관직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이르렀다.


단종조(端宗朝)에 사직(司直)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계유(癸酉. 1453- 계유정난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 찬탈)년에 벼슬을 떠났다.


부인과 장인 대호군(大護軍) 박연생(朴衍生)옹과 담양 월산(潭陽月山)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세조조에 여러 차례 관직으로 불렀으나 불응하고 마침내 늙어 산에서 질그릇을 굽으니 이로 인하여 칭하기를 포옹(逋翁)이라 하였다.


망세음(忘世吟)’ 1권을 저술 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을해(乙亥. 1455 세조1) 이후의 직명은 쓰지 말고 단지 단종 임금 때 받은 관직인 사직(司直)만 쓰라고 했다.


중조조(中宗朝)에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하고 현종(顯宗) 무신(戊申. 1668)에 사림(士林)이 스스로 협의하야 월산사(月山祠)에 제향 하였다.


숙종10년 갑자(甲子. 1684)에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