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22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바르게 쓴 글인 줄 알고 여러 카페나 블로그에 그대로 복사하여 올려놓은 글입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어쨌든 월성이씨(月城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서로 다른 관명(貫名)은 그때그때 바뀐 경주의 지명에 따라 바뀌어 왔고, 지방에 따라서는 옛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잔존(殘存)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지명 변경에 따른 유래를 다시 알아본다.
경주이씨(慶州李氏)와 월성이씨(月城李氏)는 동일한 가문의 서로 다른 명칭이다.
*경주이씨는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신라초기에는 ‘급량부이씨’ 로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혼용하였다.
*이것은 ‘월성이씨(月城李氏)’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적종(分籍宗)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가문을 본관(本貫)의 지명을 따라 그때마다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어쨌든 월성이씨(月城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서로 다른 관명(貫名)은 그때그때 바뀐 경주의 지명에 따라 바뀌어 왔고, 지방에 따라서는 옛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잔존(殘存)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소견)
'월성이씨'와 '경주이씨'의 서로 다른 관명(貫名)을 사용한 까닭을 설명한 글입니다.
경주의 옛 지명이 많아 그를 따라 여러 가지 관명으로 바뀌어 왔고, 지방에 따라서는 옛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잔존(殘存)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경주이씨'로 말하고 있습니다.
▲[*경주이씨는 신라초기에는 ‘급량부이씨’ 로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혼용하였다.]
소견)
[신라초기에는 ‘급량부 이씨’,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혼용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구분이 어느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가?
경주의 옛 군명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진한. 서라벌. 사로. 신라. 낙랑. 계림. 월성. 동경. 금오. 문천’
위와 같은 경주지역의 옛 이름을 사용하여 시대에 따라 왕조에 따라 달리 불렀으니 경주이씨의 본관도 위 지역 명에 시대에 따라 불리었지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로 조선시대에는 ‘경주이
씨’와 ‘월성이씨’로 정하여 부른 것이 아닙니다.
신라 초기인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면서 이씨 성을 사성한 한 것으로 보면 ‘급량부 이씨’라 불리었을 수도 있으나 그 뒤 고려시대고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로, 조선시대에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로 본관을 달리하여 불리었거나 혼용하였다. 라는 설명은 잘못된 내용입니다.
- 이하 생략 - 【이러한 경우는 ~ 서로 다른 명칭이다.】
▲[*이것은 ‘월성이씨(月城李氏)’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적종(分籍宗)이라서가 아니라 ]
소견)
‘월성이씨’는 ‘경주이씨’로 같은 본관입니다.
그러니까 ‘월성이씨’는 ‘경주이씨의 분적종'이라고 표기하는 자체가 잘못된 말입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경주의 지명이 시대에 따라 변천됨으로 인해서 그 명칭도 변화하였다.
예로부터 경주이씨(慶州李氏)를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하는 것은 경주의 고호(古號)가 월성(月城)이기 때문이다.
(*중시조 소판공 양호단에서의 향제에 '경주이씨' 유력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늘어서 있다.
비석에는 '월성이씨'라고 조각되어 있고, 화환에는 '경주이씨'로 기재되어 있다.
비석은 촌부출신 '월성이씨'들이 세워두고, 화환은 귀족 출신 '경주이씨'들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이런저런 이유로 본관(本貫)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지만, 일부 종중(宗中)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항렬자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많다.
* 60∼70대 이상의 남성들 중에는 항렬자(行列字)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서자(庶子)나 중인(中人)과 상민(常民)에 속하는 종중(宗中)들은 항렬자를 쓰지 못한 경우가 많고, 종중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은 조상전래의 항렬자(行列字)까지 버리고 엉뚱한 이름을 작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종중(宗中)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이들이나,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후대부터는 항렬자를 따르지 않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루한 씨족관념에 대한 무언의 항거(抗拒)라고 볼 수도 있다.
6.25 전까지는 ‘상놈’이나 서자(庶子)의 자식들은 항렬자(行列字)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의 ‘상놈’이나 그 자식들은 족보(族譜)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출생신고를 해 주는 이가 없어 호적부(戶籍簿)에도 오르지 못해 항렬자 자체가 필요치도 않았다.
성(姓)도 ‘항렬자’도 없이 그냥 ‘마당쇠’나 ‘돌쇠’, ‘언년이’, ‘끝분이’로 불리면 되었다.】
▲[ (중시조 소판공 양호단에서의 향제에 '경주이씨'유력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늘어서 있다. *비석에는 '월성이씨'라고 조각되어 있고, 화환에는 '경주이씨'로 기재되어 있다.
*비석은 촌부출신 '월성이씨'들이 세워두고, 화환은 귀족 출신 '경주이씨'들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
소견)
위 글은 설명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글입니다.
양호단은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양천부락)에 소재하는데 ‘양호단소’라고도 합니다. 제사를 모시는 ‘양호정사’가 있으며 그 위쪽에 중시조 15세 판전공(휘 강)과 같이 중시조 소판공(휘 거명)을 모신 사단이 있고 ‘판전공파’ 대종회에서 주관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단의 비석에 ‘蘇判公月城李公之社壇(소판공 월성 이공 지 사단)’ 과 ‘行判典月城李公之社壇(행 판전 월성 이공 지 사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月城(월성)‘이라고 조각되어 있고 선조제 의식에 보내온 화환에는 ’경주이씨‘라고 기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비석에는 '월성이씨'라고 조각되어 있고, 화환에는 '경주이씨'로 기재되어 있다.]
소견)
중시조님과 판전공의 비석에는 ’月城李公(월성이공)‘이라 조각되어 있고 향사(享祀)때 보내온 화환의 기증자 명에는 ’慶州李氏(경주이씨)‘라고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를 구분하여 다른 성씨인 것처럼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비석은 촌부출신 '월성이씨'들이 세워두고, 화환은 귀족 출신 '경주이씨'들이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소견)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비석은 '월성이씨'들이 세웠고, 화환은 '경주이씨'들이 갖다 놓았다면서 그것도 ’촌부출신 월성이씨‘와 ’귀족출신 경주이씨‘로 구분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장자와 장손은 촌부 출신으로 '월성이씨'를 주로 쓰고 차자나 지손들은 귀족 출신으로 '경주이씨'를 주로 사용한다.
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분을 하여 글을 올렸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글입니다.